미국 바비큐의 역사
공동체의 불에서 스포츠의 불까지
미국의 바비큐 문화는 어느 한 사람의 발명이나 한 기업의 성공으로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카리브해 원주민의 조리 기술,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사람들의 노동과 지식, 유럽 정착민이 들여온 가축과 식문화, 남부 공동체의 오랜 의례, 19세기 정치 집회, 20세기의 산업화와 전후 소비사회, 그릴과 연료를 둘러싼 기술 경쟁, 그리고 경연과 미디어까지, 서로 다른 시간과 힘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하나의 문명 현상이다.
그 흐름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게 쓸 수 있다. 공동체의 불이 가정으로 들어왔고, 가정의 불은 상품이 되었으며, 상품이 된 불은 편리해졌고, 편리해진 불은 경쟁의 도구가 되었으며, 경쟁의 불은 다시 미디어의 콘텐츠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그 다음 질문이 남아 있다. 바비큐는 스포츠가 될 수 있는가?
1. 이름의 기원 — 바라비쿠에서 바비큐로
'바비큐(Barbecue)'라는 단어의 뿌리는 아메리카 대륙 본토가 아니라 카리브해다. 1492년 콜럼버스가 히스파니올라섬(오늘날의 아이티·도미니카공화국)에 도착했을 때, 그곳의 타이노족(Taino)은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틀을 불 위에 얹어 고기와 생선을 훈연하거나 건조하는 조리 방식을 쓰고 있었다. 타이노어로 이 틀을 '바라비쿠(barabicu)'라 불렀고, 스페인 정복자들은 이를 '바르바코아(barbacoa)'로 옮겨 적었다.
스페인의 탐험가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오비에도가 1526년 문헌에 이 단어를 처음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영어 문헌에는 1697년 윌리엄 댐피어의 항해기에서 처음 등장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단어가 원래 조리법이 아니라 나무로 만든 '틀'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는 것이다. 그 틀은 잠자리나 저장고로도 쓰였다. 시간이 흐르며 의미는 도구에서 조리 행위로, 다시 조리된 음식 자체로 확장되어 갔다.
이후,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의 『A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영어사전, 1755년 4월 15일 출간)이다. 이 사전에 "to barbecue"라는 표제어가 실렸는데, 정의는 다음과 같다
(원문 그대로 번역하면) : "서인도제도에서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손질하는 데 쓰이는 말. 등뼈를 따라 갈라서 평평하게 펼친 뒤, 숯불 위 약 2피트 높이에 놓인 큰 석쇠에 올려 굽는다."
여기에는 몇 가지 참고할 배경이 있다.
새뮤얼 존슨의 이 사전은 총 42,000여 개 표제어, 2,3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작업으로, 옥스퍼드 영어사전(OED)이 나오기 전까지 150년 넘게 영어권의 표준 사전으로 군림했다는 것이고, "barbecue"라는 단어 자체가 영어 인쇄물에 등장한 것은 이보다 앞선 1697년(윌리엄 댐피어의 항해기)이지만, 권위 있는 사전에 정식 표제어로 등재된 것은 1755년 존슨 사전이 처음이라는 것이다.
2. 세 갈래의 결합 — 원주민, 아프리카, 유럽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바비큐가 지금과 같은 형태로 자리잡기까지, 서로 다른 세 갈래의 흐름이 겹쳤다. 미국 남동부의 원주민들은 이미 고기를 불 곁에서 천천히 익히고 훈연하는 야외 조리 기술을 갖고 있었다. 16~17세기 아메리카로 강제로 끌려온 아프리카인들은 자신들의 화덕 조리 전통과 향신료 사용법을 여기에 결합시켰다. 남부 대농장에서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다루는 실제 노동을 맡은 것은 대부분 아프리카계 요리사들이었고, 오늘날 '피트마스터(Pitmaster)'라는 말의 뿌리도 이 계보와 이어진다 — 이 단어는 원래 바비큐를 총괄하던 나이 많은 노예 요리사를 가리켰다. 1840년 아칸소에서 대규모 바비큐 행사를 지휘했던 노예 여성 메리 존(Mary John)처럼, 뛰어난 실력으로 지역사회에서 명성을 얻고 그 명성을 발판으로 자유를 산 사례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유럽 정착민들은 여기에 가축과 잔치의 사회적 관행을 더했다. 돼지는 남부의 환경에서 사육하기 쉬웠고, 대규모 손님 접대에 알맞은 가축이었다. 조지 워싱턴의 일기에도 버지니아에서 바비큐 행사에 참석했다는 기록이 여러 차례 나온다. 결국 초기 미국 바비큐는 고기와 불, 공동체와 잔치,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노동이 한데 얽힌 결과물이었다. 다시 말해 미국 바비큐의 역사는 단순한 음식의 역사가 아니라 노동의 역사이자 인종의 역사이기도 하다. 최근 애드리언 밀러의 저서 『Black Smoke: African Americans and the United States of Barbecue』(2021)가 그동안 이름 없이 지워졌던 아프리카계 피트마스터들의 계보를 복원하면서, 이 오래된 서술 자체가 다시 쓰이고 있는 중이다.
3. 광장의 음식 — 19세기, 바비큐와 정치가 만나다
19세기 미국에서 바비큐는 단순한 음식을 넘어 하나의 정치적 장치였다. 선거권이 점점 넓은 계층으로 확대되던 시기, 정당과 후보들은 유권자를 한자리에 모으기 위해 대규모 바비큐를 열었다. 소나 돼지를 통째로 구워 나눠주는 행사는 계급을 넘어 사람들을 잠시나마 한 식탁에 앉히는 효과적인 수단이었고, 미국 국회의사당 부지에도 이런 집회를 위한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바비큐와 인연이 깊은 인물이다. 그의 부모는 1806년 켄터키에서 결혼 피로연으로 곰고기·사슴고기·야생 칠면조를 곁들인 바비큐를 열었고, 링컨 자신도 1858년 상원의원 선거 유세 중 바비큐 자리의 주빈으로 참석한 기록이 있다. 1876년 뉴욕 브루클린에서는 공화당이 소 두 마리를 통째로 거리에서 행진시킨 뒤 공원에서 구워 샌드위치로 나눠준 대규모 정치 바비큐가 열리기도 했다. 이 시기를 거치며 바비큐의 기능은 '먹는 것'에서 '사람을 모으는 장치', 나아가 '정치적 관계를 만드는 장치'로 확장됐다.
4. 지역이 정체성이 되다 —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오늘날 미국을 대표하는 네 지역 바비큐 스타일의 윤곽이 뚜렷해진 것도 이 무렵이다. 캐롤라이나는 돼지고기 중심으로, 동부는 통돼지를, 서부(렉싱턴 스타일)는 앞다리살을 중심에 둔 전통이 자리잡았고 식초 베이스 소스와 겨자 베이스 소스가 지역에 따라 나뉘었다. 텍사스는 대규모 목축업과 독일·체코계 이주민의 훈연 기술이 결합해 소고기, 특히 브리스킷 중심의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중부 텍사스는 소금과 후추만 쓰는 미니멀리즘으로 유명하다. 멤피스는 돼지 갈비와 어깨살을 중심으로 소스를 바르지 않는 '드라이' 방식과 바르는 '웻' 방식이 공존했다.
캔자스시티 스타일은 20세기 초 테네시 출신 헨리 페리(Henry Perry)가 신문지에 싸서 팔던 훈연육에서 출발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페리의 제자였던 아서 브라이언트가 이어받은 가게는 지금도 영업 중이다. 캔자스시티는 거의 모든 육류를 취급하며 당밀이 들어간 진하고 단 토마토 베이스 소스로 잘 알려져 있다. 이렇게 지역 조리법은 곧 지역 정체성이 되었고, 지역 정체성은 다시 하나의 브랜드가 되어갔다.
5. 폐기물에서 상품으로 — 숯이 산업이 되다
바비큐가 대량생산 경제와 본격적으로 결합한 계기는 뜻밖에도 자동차 산업에서 나왔다. 1919년 헨리 포드는 모델 T 제작에 필요한 목재를 자체 조달하기 위해 미시간에 제재소를 세웠는데, 이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톱밥과 나무 부스러기가 쏟아져 나왔다. 포드는 화학자 오린 스태퍼드가 개발한 공법 — 톱밥에 타르를 섞어 굳히는 방식 — 을 사들여 이 폐기물을 '숯 브리켓'으로 상품화했고, 공장 설계는 토머스 에디슨이 맡았다.
포드 생전에는 이 사업이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1951년 한 투자자 그룹이 사업을 인수해 '킹스포드(Kingsford)'라는 이름으로 다시 시장에 내놓았다. 마침 전후 교외 뒷마당 문화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시기와 맞물리면서 킹스포드는 빠르게 자리를 잡았고, 지금도 미국 숯 시장의 약 80퍼센트를 차지하는 압도적인 브랜드로 남아 있다. 여기서 일어난 산업적 전환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폐기물이 연료가 되고, 연료가 상품이 되고, 상품이 하나의 산업을 낳은 과정이라 할 수 있다.
6. 마당이라는 새로운 무대 — 전후 교외화와 백야드 그릴링
현대적 형태의 '백야드 바비큐(backyard barbecue)'는 1920년대 미국 교외화가 시작되면서 그 초기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잡지들은 '마당에 작은 구덩이를 파서 굽는 법' 같은 기사를 싣기 시작했는데, 이는 19세기 공동체 단위의 대형 피트 바비큐가 개인 주택 마당 크기로 축소된 형태였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2차 대전 이후, 1940년대 말에서 1950년대에 걸쳐 찾아왔다. 참전을 마치고 돌아온 미국인들이 대거 교외 단독주택으로 이주하면서 '내 집 마당'이라는 공간이 폭발적으로 늘었고, 여기에 베이비붐과 중산층의 성장, 자동차 중심 생활, 늘어난 여가 시간과 소비 여력이 겹쳤다. 마당은 이제 사적인 여가의 공간이 되었고, 바비큐의 무대는 마을의 공동 행사장에서 한 가족의 뒷마당으로 옮겨갔다. 역설적으로, 불이 놓이는 사회적 공간은 작아졌지만 그 불을 둘러싼 시장은 오히려 커졌다.
1962년 워싱턴 이브닝 스타는 그해 여름이 끝나기 전 미국인들이 20억 끼에 달하는 야외 식사를 소비할 것이라고 보도했을 정도로, 1950년대와 60년대는 미국 백야드 그릴링의 황금기로 불린다. 다만 이 시기를 '미국 바비큐의 탄생'이라 부르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남부의 전통적인 바비큐 문화는 이미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이 시기에 새로 생겨난 것은 바비큐 자체가 아니라, 전후의 풍요와 교외화가 만들어낸 '현대적 백야드 그릴링 문화'였다.
이 시기 백야드 그릴링을 둘러싼 대중문화에는 성별 역할의 이미지도 뚜렷하게 새겨졌다. 여성이 주방에서 곁들이 음식을 준비하고 남성이 마당에서 그릴을 담당하는 장면이 당시 광고와 잡지에서 되풀이해 등장했고, 이는 훗날 '그릴 마스터'나 '피트마스터' 같은 표현에 깃든 남성적 이미지로 이어졌다.
7. 웨버 케틀 — 가정의 불을 길들이다
이 시기 백야드 그릴링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제품 하나를 꼽는다면 단연 웨버 케틀이다. 시카고 인근의 금속 제조업체 웨버 브라더스 메탈 웍스에서 일하던 조지 스티븐은 뒷마당에 벽돌로 만든 자신의 그릴이 바람에 재를 날리고 열을 고르게 잡아주지 못하는 데 불만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다루던 선박용 부표의 반구형 구조에서 착안해, 반구 두 개를 맞붙이고 뚜껑을 단 둥근 그릴을 고안했다.
스미스소니언 국립미국사박물관의 소장 기록에 따르면 스티븐은 1951년 이 그릴을 만들었고, 웨버의 공식 연혁은 1952년을 '조지의 바비큐 케틀' 판매가 시작된 해로 기록한다. 개발과 상용화 사이에 시차가 있었던 셈이다. 초기 제품은 29.95달러에 팔렸고 처음부터 폭발적으로 팔린 것은 아니었지만, 점차 입소문을 타며 자리를 잡았고 1958년 스티븐이 웨버 브라더스의 사업을 인수해 '웨버-스티븐 프로덕츠'라는 이름으로 독립했다.
이 그릴의 진짜 혁신은 형태 자체가 아니라 뚜껑에 있었다. 뚜껑을 덮으면 열과 연기가 그릇 안에 갇혀 대류가 만들어지고, 바람과 비의 영향을 덜 받게 되며, 숯불의 위치에 따라 직접구이와 간접구이를 동시에 구현할 수 있었다. 즉 웨버 케틀은 형태의 발명이 아니라, 불을 가정에서도 다룰 수 있는 하나의 통제 가능한 시스템으로 바꾼 발명이었다.
8. 편리함의 유혹 — 가스그릴의 등장과 성장
숯불 중심의 백야드 그릴링 시장에 새로운 연료가 등장한 것은 1960년대 초다. 천연가스 판매를 늘릴 방법을 찾던 아칸소의 가스회사 아클라(Arkla, Arkansas Louisiana Gas Company)의 마케팅 담당자 윌리엄 웹퍼와 멜튼 랭카스터가 일반 숯불그릴을 가스로 태우도록 개조한 제품, '아클라 엠버매틱(Arkla Embermatic)'을 선보였다. 이 제품을 세계 최초의 가스그릴이라 단정하기보다는, 초기 상업용 야외 가스그릴 가운데 하나이자 일반적으로 최초의 가정용 야외 가스그릴로 소개되는 제품이라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숯불그릴은 숯을 준비하고, 불을 붙이고, 불이 오르기를 기다리고, 열의 세기를 가늠하고, 재를 처리하는 일련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가스그릴은 이 노동의 대부분을 없앴다. 숯불이 '불을 만드는 경험'이었다면, 가스불은 '불을 사용하는 편리함'이었던 셈이다. 이는 단순한 연료의 교체가 아니라, 불이라는 현상 자체가 하나의 연료 공급 시스템으로 전환되는 사건이었다.
웨버의 공식 연혁은 1971년 '가스 바비큐 케틀'을 가스그릴 시장 진출작으로 기록하지만, 이 제품이 웨버의 대표 상품으로 자리잡지는 못했다. 1980년대 초 소비자들의 관심이 점점 가스그릴 쪽으로 옮겨가면서 위기감을 느낀 웨버는 회사의 역량을 집중해 새로운 제품을 개발했고, 1985년 마침내 '지니시스(Genesis)' 라인을 출시했다. 오픈 카트 구조, 도자기 코팅 그릴망, 특허받은 플레이버라이저 바, 버튼식 점화 장치를 갖춘 지니시스는 큰 성공을 거두며 웨버를 숯불 중심의 그릴 회사에서 숯과 가스를 아우르는 종합 아웃도어 쿠킹 회사로 확장시켰다. 정리하자면 1971년이 웨버가 가스그릴 시장에 진입한 원년이라면, 1985년은 그 진입이 비로소 성공으로 이어진 원년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를 지나며 바비큐를 둘러싼 산업도 함께 몸집을 불렸다. 그릴 본체를 넘어 커버, 도구, 소스, 시즈닝, 앞치마와 장갑, 야외 가구, 서빙 용품, 요리책, 로티세리와 스모커까지 — 바비큐는 더 이상 하나의 음식이 아니라 하나의 소비 생활 체계로 자리잡아 갔다.
9. 대통령의 식탁 — 바비큐 외교
바비큐가 남부의 지역 음식에서 미국을 대표하는 상징적 이미지로 옮겨가는 데는 린든 존슨 대통령의 역할이 컸다. 텍사스 출신인 존슨은 자신의 목장, 이른바 '텍사스 백악관'으로 불린 LBJ 랜치를 정치·외교의 무대로 적극 활용했다. 1963년 12월 29일, 존슨은 이곳에서 서독 총리 루트비히 에르하르트를 맞아 텍사스식 바비큐 만찬을 열었다. 포트워스 출신의 케이터러 월터 제튼이 이 자리의 요리를 맡았고, 이후 제튼은 존슨의 전속 요리사가 되어 전국 유세를 따라다니며 바비큐를 구웠다.
1964년 재선 유세 기간, 이런 방식은 하나의 정치적 전략으로 굳어졌다. 뉴욕 헤럴드트리뷴의 한 기자가 이를 두고 '바비큐 외교(barbecue diplomacy)'라는 표현을 처음 썼고, 뉴요커의 평론가 브렌던 길은 상징으로서의 이 바비큐가 1952년 애들레이 스티븐슨의 구두 밑창 구멍 사진에 견줄 만하다고 평했다. 여기서 강조할 것은 이 사건이 '백악관이 바비큐를 미국의 국가 요리로 공식 지정했다'는 식의 제도적 사건이 아니라는 점이다. 정확히 말하면, 1963~64년 LBJ 랜치에서 이뤄진 바비큐 외교는 텍사스 바비큐가 지역 음식문화의 영역을 벗어나 대통령의 식탁과 문화 외교의 영역으로 옮겨간 상징적인 사례였다.
10. 조리가 경기가 될 때 — 경쟁 바비큐의 탄생
1970년대 오일쇼크는 미국 사회 전반에 대체 에너지와 연료 효율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이런 시대적 분위기는 이후 펠릿을 비롯한 새로운 연료와 장비 기술이 발전하는 배경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 바비큐는 본격적으로 경쟁의 영역에 발을 들이기 시작한다.
1978년 테네시 멤피스에서 '멤피스 인 메이 국제 바비큐 요리 경연대회'가 처음 열렸다. 오르페움 극장 앞 주차장에서 소규모로 시작한 이 대회는 이후 '돼지들의 슈퍼볼'이라 불리는 세계 최대 규모의 바비큐 경연대회로 성장했다. 1980년에는 캔자스시티에서 '아메리칸 로열' 대회가 시작되며 경쟁 문화의 네트워크가 넓어졌고, 1985년에는 캐롤린 웰스를 비롯한 이들이 '캔자스시티 바비큐 소사이어티(KCBS)'를 설립해 심사와 규정을 표준화했다. 조리, 제출, 심사, 순위, 상금이라는 경쟁의 문법이 이때부터 자리를 잡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참가팀 수나 상금 규모 같은 세부 수치가 아니다. 그런 숫자들은 자료마다 다소 엇갈리는 경우가 많다. 정말 중요한 변화는 구조 자체에 있다. 바비큐가 '먹는 것'에서 '잘하는 것을 평가받는 것'으로, 조리라는 행위가 평가 가능한 경쟁 행위로 옮겨간 것이다. 이 지점이 바로 오늘날 이야기되는 '경쟁 바비큐(Competition Barbecue)'의 출발점이며, 나아가 '스포츠 바비큐(Sports Barbecue)'라는 개념이 뿌리내릴 토양이 마련된 순간이기도 하다.
다만 경쟁 바비큐와 완성된 형태의 스포츠는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경쟁 바비큐의 중심에는 참가, 조리, 제출, 심사, 순위, 상금이 있다. 반면 스포츠 바비큐는 여기에 선수, 팀, 경기 규칙, 심판, 리그, 시즌, 랭킹, 기록, 경기장, 관중, 방송, 스폰서, 팬덤과 같은 스포츠 산업의 시스템 전체를 더한다. 경쟁 바비큐가 '경쟁이 형성되는 과정'이라면, 스포츠 바비큐는 '그 경쟁을 하나의 스포츠 체계로 조직하는 과정'이라 정의할 수 있다.
11. 화면 속으로 — 미디어 바비큐와 세계화
1990년 멤피스 인 메이는 대형 규모의 바비큐 행사로 성장하며 굿모닝 아메리카, 투데이 쇼, CBS, 푸드 네트워크, USA 투데이, 월스트리트저널 등 주요 매체의 취재를 받았다. 경쟁 바비큐는 이제 하나의 이벤트를 넘어 미디어 이벤트가 되어갔다.
1990년대 이후 케이블 TV와 요리 프로그램이 확산되면서 지역의 바비큐 문화는 전국적인, 나아가 세계적인 콘텐츠로 옮겨갔다. TV와 잡지, 요리책을 거쳐 인터넷과 유튜브, SNS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피트마스터의 위상도 달라졌다. 과거에는 지역 사회에서만 알려진 장인이었다면, 미디어 시대의 피트마스터는 요리사이자 장인이며 동시에 선수이자 하나의 문화적 인물이 되었다.
스티븐 라이클렌 같은 저술가이자 방송인은 바비큐를 남부의 지역 음식에 가두지 않고 세계적인 조리 문화로 소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텍사스 힐컨트리식 브리스킷이 텍사스 밖에서 팔리고, 캐롤라이나 풀드포크가 전국 프랜차이즈의 메뉴에 오르는 등 지역 스타일 사이의 경계도 점차 흐려졌다. 바비큐는 이렇게 지역화에서 전국화로, 다시 세계화로 이어지는 길을 걸었다.
12. 가려졌던 이름들 — 흑인 피트마스터의 귀환
미국 바비큐사를 다시 쓰는 최근의 중요한 흐름 가운데 하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피트마스터들의 역사적 기여를 되짚는 작업이다. 그동안의 바비큐 역사 서술은 흔히 백인 소유주와 유명 레스토랑 브랜드를 중심으로 기록되어 왔지만, 실제로 조리 기술을 발전시키고 지켜온 것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아프리카계 요리사와 피트마스터들이었다. 애드리언 밀러의 『Black Smoke』는 이러한 역사 복원 작업을 대표하는 저작으로 꼽힌다. 이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미국 바비큐의 역사는 결국 음식의 역사이자 노동의 역사, 인종의 역사, 그리고 문화와 권력의 역사로 함께 읽어야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13. 맺음말 — 다음 질문, 스포츠 바비큐
이 모든 흐름을 하나로 압축한다면 이렇게 쓸 수 있을 것이다. 미국 바비큐의 현대사는 공동체의 큰 불이 교외 주택의 작은 불로 옮겨가고, 그 불이 숯과 가스를 거치며 산업화되고, 다시 경쟁과 미디어를 통해 하나의 문화 산업으로 자라난 역사다. 불이 놓인 자리는 마을의 광장에서 대농장으로, 교외의 뒷마당으로, 상업 레스토랑으로, 경기장으로, 다시 텔레비전과 인터넷 화면 속으로 계속 옮겨 다녔다. 그리고 그때마다 바비큐가 수행한 사회적 기능도 함께 바뀌었다 — 사람을 모으는 음식에서, 정치적으로 사람을 모으는 음식으로, 가족을 모으는 여가로, 경쟁자를 모으는 경기로, 시청자를 모으는 콘텐츠로. 그러나 그 핵심 기능 자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바비큐는 언제나 사람을 모아왔다. 달라진 것은 누구를,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모으는가 하는 문제였을 뿐이다.
경쟁 바비큐는 이미 참가자, 경기, 심판, 규칙, 점수, 순위, 상금, 대회, 지역 네트워크, 미디어의 관심이라는 기반을 만들어냈다. 스포츠 바비큐는 여기에 선수와 리그, 시즌과 랭킹, 기록과 관람, 방송과 산업이라는 완전한 스포츠 시스템을 더하는 다음 단계다. 이 구조가 완성될 때, 바비큐는 단순한 요리 경연을 넘어 하나의 스포츠 산업으로 발전할 잠재력을 갖게 된다.
다만 스포츠 바비큐의 의미를 상업 프로스포츠의 단순한 모방으로 좁혀 볼 필요는 없다. 바비큐는 본래 불과 음식, 시간과 기다림, 함께 먹는 행위와 나눔, 의례와 축제, 그리고 공동체를 모두 포함하는 오래된 행위였다. 그러므로 스포츠 바비큐가 갖는 진짜 의미는 경기장이나 방송권이 아니라, 인간이 불을 둘러싸고 함께 놀고 경쟁하고 먹고 이야기하며 관계를 만들어온 그 오래된 행위가 마침내 현대적인 스포츠의 형식을 갖추게 되는 과정에 있다. 음식이 스포츠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오래된 불의 의례가 스포츠의 형식을 획득하는 것이다.
연대표
시 기 | 사 건 |
1492~1526 | 타이노어 '바라비쿠' → 스페인어 '바르바코아'로 문헌 기록 |
17~18세기 | 원주민·아프리카계·유럽 정착민의 기술이 결합해 남부 바비큐 형성 |
19세기 | 정치 집회의 핵심 행사로 제도화 (링컨, 브루클린 대규모 바비큐 등) |
19세기 말~20세기 초 | 텍사스·캐롤라이나·멤피스·캔자스시티 4대 지역 스타일 형성 |
1919~1951 | 헨리 포드의 목재 폐기물 재활용 → 킹스포드 숯 브랜드 탄생 |
1945년 전후~1950년대 | 전후 교외화, 백야드 그릴링 대중화 |
1951/1952 | 조지 스티븐, 웨버 케틀 개발(1951)·판매 개시(1952) |
1958 | 웨버-스티븐 프로덕츠 공식 설립 |
1960년대 초 | 아클라, 상업적 야외 가스그릴 '엠버매틱' 개발 |
1963년 12월 | LBJ 랜치에서 서독 총리 에르하르트를 맞은 첫 바비큐 국빈 만찬 |
1971 | 웨버, '가스 바비큐 케틀'로 가스그릴 시장 첫 진입 |
1978 | 멤피스 인 메이 국제 바비큐 요리 경연대회 시작 |
1980 | 캔자스시티, 아메리칸 로열 대회 시작 |
1985 | KCBS 설립, 웨버 '지니시스' 출시로 가스그릴 시장 안착 |
1990 | 멤피스 인 메이, 대형 미디어 이벤트로 성장 |
1990년대~현재 | 케이블 요리방송·인터넷을 통한 전국화·세계화 |
2021 | 애드리언 밀러 『Black Smoke』 출간, 흑인 피트마스터 역사 재조명 |
참고 자료
Smithsonian Institution / National Museum of American History — Weber Kettle 소장 기록, Postwar Potluck: Grilling Out, Convenience Cooking, and Other 1950s Food Trends
Smithsonian Magazine — The Story of the Weber Grill Begins With a Buoy / Swilling the Planters With Bumbo: When Booze Bought Elections
Weber Grills 공식 연혁 — Our History / 65 Years of Innovation / The Evolution of the Gas Grill / The Kettle That Started It All
Wikipedia — George A. Stephen, Weber Inc., Kingsford (charcoal), Memphis in May, Barbecue in the United States
AmazingRibs.com — Barbecue Diplomacy at LBJ's Texas White House
Texas Monthly — Commanders in Beef (and Pork)
Barbecuebible.com — Black Smoke: African Americans and the United States of Barbecue (Adrian Miller 저서 서평)
KQED — Barbecue Is Everywhere for the Fourth of July. Here's Its Origin Story
BBQ Brethren Forums / Australian BBQ Alliance — 경연 바비큐 역사 관련 스레드

미국 바비큐의 역사
공동체의 불에서 스포츠의 불까지
미국의 바비큐 문화는 어느 한 사람의 발명이나 한 기업의 성공으로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카리브해 원주민의 조리 기술,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사람들의 노동과 지식, 유럽 정착민이 들여온 가축과 식문화, 남부 공동체의 오랜 의례, 19세기 정치 집회, 20세기의 산업화와 전후 소비사회, 그릴과 연료를 둘러싼 기술 경쟁, 그리고 경연과 미디어까지, 서로 다른 시간과 힘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하나의 문명 현상이다.
그 흐름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게 쓸 수 있다. 공동체의 불이 가정으로 들어왔고, 가정의 불은 상품이 되었으며, 상품이 된 불은 편리해졌고, 편리해진 불은 경쟁의 도구가 되었으며, 경쟁의 불은 다시 미디어의 콘텐츠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그 다음 질문이 남아 있다. 바비큐는 스포츠가 될 수 있는가?
1. 이름의 기원 — 바라비쿠에서 바비큐로
'바비큐(Barbecue)'라는 단어의 뿌리는 아메리카 대륙 본토가 아니라 카리브해다. 1492년 콜럼버스가 히스파니올라섬(오늘날의 아이티·도미니카공화국)에 도착했을 때, 그곳의 타이노족(Taino)은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틀을 불 위에 얹어 고기와 생선을 훈연하거나 건조하는 조리 방식을 쓰고 있었다. 타이노어로 이 틀을 '바라비쿠(barabicu)'라 불렀고, 스페인 정복자들은 이를 '바르바코아(barbacoa)'로 옮겨 적었다.
스페인의 탐험가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오비에도가 1526년 문헌에 이 단어를 처음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영어 문헌에는 1697년 윌리엄 댐피어의 항해기에서 처음 등장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단어가 원래 조리법이 아니라 나무로 만든 '틀'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는 것이다. 그 틀은 잠자리나 저장고로도 쓰였다. 시간이 흐르며 의미는 도구에서 조리 행위로, 다시 조리된 음식 자체로 확장되어 갔다.
이후,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의 『A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영어사전, 1755년 4월 15일 출간)이다. 이 사전에 "to barbecue"라는 표제어가 실렸는데, 정의는 다음과 같다
(원문 그대로 번역하면) : "서인도제도에서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손질하는 데 쓰이는 말. 등뼈를 따라 갈라서 평평하게 펼친 뒤, 숯불 위 약 2피트 높이에 놓인 큰 석쇠에 올려 굽는다."
여기에는 몇 가지 참고할 배경이 있다.
새뮤얼 존슨의 이 사전은 총 42,000여 개 표제어, 2,3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작업으로, 옥스퍼드 영어사전(OED)이 나오기 전까지 150년 넘게 영어권의 표준 사전으로 군림했다는 것이고, "barbecue"라는 단어 자체가 영어 인쇄물에 등장한 것은 이보다 앞선 1697년(윌리엄 댐피어의 항해기)이지만, 권위 있는 사전에 정식 표제어로 등재된 것은 1755년 존슨 사전이 처음이라는 것이다.
2. 세 갈래의 결합 — 원주민, 아프리카, 유럽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바비큐가 지금과 같은 형태로 자리잡기까지, 서로 다른 세 갈래의 흐름이 겹쳤다. 미국 남동부의 원주민들은 이미 고기를 불 곁에서 천천히 익히고 훈연하는 야외 조리 기술을 갖고 있었다. 16~17세기 아메리카로 강제로 끌려온 아프리카인들은 자신들의 화덕 조리 전통과 향신료 사용법을 여기에 결합시켰다. 남부 대농장에서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다루는 실제 노동을 맡은 것은 대부분 아프리카계 요리사들이었고, 오늘날 '피트마스터(Pitmaster)'라는 말의 뿌리도 이 계보와 이어진다 — 이 단어는 원래 바비큐를 총괄하던 나이 많은 노예 요리사를 가리켰다. 1840년 아칸소에서 대규모 바비큐 행사를 지휘했던 노예 여성 메리 존(Mary John)처럼, 뛰어난 실력으로 지역사회에서 명성을 얻고 그 명성을 발판으로 자유를 산 사례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유럽 정착민들은 여기에 가축과 잔치의 사회적 관행을 더했다. 돼지는 남부의 환경에서 사육하기 쉬웠고, 대규모 손님 접대에 알맞은 가축이었다. 조지 워싱턴의 일기에도 버지니아에서 바비큐 행사에 참석했다는 기록이 여러 차례 나온다. 결국 초기 미국 바비큐는 고기와 불, 공동체와 잔치,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노동이 한데 얽힌 결과물이었다. 다시 말해 미국 바비큐의 역사는 단순한 음식의 역사가 아니라 노동의 역사이자 인종의 역사이기도 하다. 최근 애드리언 밀러의 저서 『Black Smoke: African Americans and the United States of Barbecue』(2021)가 그동안 이름 없이 지워졌던 아프리카계 피트마스터들의 계보를 복원하면서, 이 오래된 서술 자체가 다시 쓰이고 있는 중이다.
3. 광장의 음식 — 19세기, 바비큐와 정치가 만나다
19세기 미국에서 바비큐는 단순한 음식을 넘어 하나의 정치적 장치였다. 선거권이 점점 넓은 계층으로 확대되던 시기, 정당과 후보들은 유권자를 한자리에 모으기 위해 대규모 바비큐를 열었다. 소나 돼지를 통째로 구워 나눠주는 행사는 계급을 넘어 사람들을 잠시나마 한 식탁에 앉히는 효과적인 수단이었고, 미국 국회의사당 부지에도 이런 집회를 위한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바비큐와 인연이 깊은 인물이다. 그의 부모는 1806년 켄터키에서 결혼 피로연으로 곰고기·사슴고기·야생 칠면조를 곁들인 바비큐를 열었고, 링컨 자신도 1858년 상원의원 선거 유세 중 바비큐 자리의 주빈으로 참석한 기록이 있다. 1876년 뉴욕 브루클린에서는 공화당이 소 두 마리를 통째로 거리에서 행진시킨 뒤 공원에서 구워 샌드위치로 나눠준 대규모 정치 바비큐가 열리기도 했다. 이 시기를 거치며 바비큐의 기능은 '먹는 것'에서 '사람을 모으는 장치', 나아가 '정치적 관계를 만드는 장치'로 확장됐다.
4. 지역이 정체성이 되다 —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오늘날 미국을 대표하는 네 지역 바비큐 스타일의 윤곽이 뚜렷해진 것도 이 무렵이다. 캐롤라이나는 돼지고기 중심으로, 동부는 통돼지를, 서부(렉싱턴 스타일)는 앞다리살을 중심에 둔 전통이 자리잡았고 식초 베이스 소스와 겨자 베이스 소스가 지역에 따라 나뉘었다. 텍사스는 대규모 목축업과 독일·체코계 이주민의 훈연 기술이 결합해 소고기, 특히 브리스킷 중심의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중부 텍사스는 소금과 후추만 쓰는 미니멀리즘으로 유명하다. 멤피스는 돼지 갈비와 어깨살을 중심으로 소스를 바르지 않는 '드라이' 방식과 바르는 '웻' 방식이 공존했다.
캔자스시티 스타일은 20세기 초 테네시 출신 헨리 페리(Henry Perry)가 신문지에 싸서 팔던 훈연육에서 출발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페리의 제자였던 아서 브라이언트가 이어받은 가게는 지금도 영업 중이다. 캔자스시티는 거의 모든 육류를 취급하며 당밀이 들어간 진하고 단 토마토 베이스 소스로 잘 알려져 있다. 이렇게 지역 조리법은 곧 지역 정체성이 되었고, 지역 정체성은 다시 하나의 브랜드가 되어갔다.
5. 폐기물에서 상품으로 — 숯이 산업이 되다
바비큐가 대량생산 경제와 본격적으로 결합한 계기는 뜻밖에도 자동차 산업에서 나왔다. 1919년 헨리 포드는 모델 T 제작에 필요한 목재를 자체 조달하기 위해 미시간에 제재소를 세웠는데, 이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톱밥과 나무 부스러기가 쏟아져 나왔다. 포드는 화학자 오린 스태퍼드가 개발한 공법 — 톱밥에 타르를 섞어 굳히는 방식 — 을 사들여 이 폐기물을 '숯 브리켓'으로 상품화했고, 공장 설계는 토머스 에디슨이 맡았다.
포드 생전에는 이 사업이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1951년 한 투자자 그룹이 사업을 인수해 '킹스포드(Kingsford)'라는 이름으로 다시 시장에 내놓았다. 마침 전후 교외 뒷마당 문화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시기와 맞물리면서 킹스포드는 빠르게 자리를 잡았고, 지금도 미국 숯 시장의 약 80퍼센트를 차지하는 압도적인 브랜드로 남아 있다. 여기서 일어난 산업적 전환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폐기물이 연료가 되고, 연료가 상품이 되고, 상품이 하나의 산업을 낳은 과정이라 할 수 있다.
6. 마당이라는 새로운 무대 — 전후 교외화와 백야드 그릴링
현대적 형태의 '백야드 바비큐(backyard barbecue)'는 1920년대 미국 교외화가 시작되면서 그 초기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잡지들은 '마당에 작은 구덩이를 파서 굽는 법' 같은 기사를 싣기 시작했는데, 이는 19세기 공동체 단위의 대형 피트 바비큐가 개인 주택 마당 크기로 축소된 형태였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2차 대전 이후, 1940년대 말에서 1950년대에 걸쳐 찾아왔다. 참전을 마치고 돌아온 미국인들이 대거 교외 단독주택으로 이주하면서 '내 집 마당'이라는 공간이 폭발적으로 늘었고, 여기에 베이비붐과 중산층의 성장, 자동차 중심 생활, 늘어난 여가 시간과 소비 여력이 겹쳤다. 마당은 이제 사적인 여가의 공간이 되었고, 바비큐의 무대는 마을의 공동 행사장에서 한 가족의 뒷마당으로 옮겨갔다. 역설적으로, 불이 놓이는 사회적 공간은 작아졌지만 그 불을 둘러싼 시장은 오히려 커졌다.
1962년 워싱턴 이브닝 스타는 그해 여름이 끝나기 전 미국인들이 20억 끼에 달하는 야외 식사를 소비할 것이라고 보도했을 정도로, 1950년대와 60년대는 미국 백야드 그릴링의 황금기로 불린다. 다만 이 시기를 '미국 바비큐의 탄생'이라 부르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남부의 전통적인 바비큐 문화는 이미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이 시기에 새로 생겨난 것은 바비큐 자체가 아니라, 전후의 풍요와 교외화가 만들어낸 '현대적 백야드 그릴링 문화'였다.
이 시기 백야드 그릴링을 둘러싼 대중문화에는 성별 역할의 이미지도 뚜렷하게 새겨졌다. 여성이 주방에서 곁들이 음식을 준비하고 남성이 마당에서 그릴을 담당하는 장면이 당시 광고와 잡지에서 되풀이해 등장했고, 이는 훗날 '그릴 마스터'나 '피트마스터' 같은 표현에 깃든 남성적 이미지로 이어졌다.
7. 웨버 케틀 — 가정의 불을 길들이다
이 시기 백야드 그릴링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제품 하나를 꼽는다면 단연 웨버 케틀이다. 시카고 인근의 금속 제조업체 웨버 브라더스 메탈 웍스에서 일하던 조지 스티븐은 뒷마당에 벽돌로 만든 자신의 그릴이 바람에 재를 날리고 열을 고르게 잡아주지 못하는 데 불만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다루던 선박용 부표의 반구형 구조에서 착안해, 반구 두 개를 맞붙이고 뚜껑을 단 둥근 그릴을 고안했다.
스미스소니언 국립미국사박물관의 소장 기록에 따르면 스티븐은 1951년 이 그릴을 만들었고, 웨버의 공식 연혁은 1952년을 '조지의 바비큐 케틀' 판매가 시작된 해로 기록한다. 개발과 상용화 사이에 시차가 있었던 셈이다. 초기 제품은 29.95달러에 팔렸고 처음부터 폭발적으로 팔린 것은 아니었지만, 점차 입소문을 타며 자리를 잡았고 1958년 스티븐이 웨버 브라더스의 사업을 인수해 '웨버-스티븐 프로덕츠'라는 이름으로 독립했다.
이 그릴의 진짜 혁신은 형태 자체가 아니라 뚜껑에 있었다. 뚜껑을 덮으면 열과 연기가 그릇 안에 갇혀 대류가 만들어지고, 바람과 비의 영향을 덜 받게 되며, 숯불의 위치에 따라 직접구이와 간접구이를 동시에 구현할 수 있었다. 즉 웨버 케틀은 형태의 발명이 아니라, 불을 가정에서도 다룰 수 있는 하나의 통제 가능한 시스템으로 바꾼 발명이었다.
8. 편리함의 유혹 — 가스그릴의 등장과 성장
숯불 중심의 백야드 그릴링 시장에 새로운 연료가 등장한 것은 1960년대 초다. 천연가스 판매를 늘릴 방법을 찾던 아칸소의 가스회사 아클라(Arkla, Arkansas Louisiana Gas Company)의 마케팅 담당자 윌리엄 웹퍼와 멜튼 랭카스터가 일반 숯불그릴을 가스로 태우도록 개조한 제품, '아클라 엠버매틱(Arkla Embermatic)'을 선보였다. 이 제품을 세계 최초의 가스그릴이라 단정하기보다는, 초기 상업용 야외 가스그릴 가운데 하나이자 일반적으로 최초의 가정용 야외 가스그릴로 소개되는 제품이라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숯불그릴은 숯을 준비하고, 불을 붙이고, 불이 오르기를 기다리고, 열의 세기를 가늠하고, 재를 처리하는 일련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가스그릴은 이 노동의 대부분을 없앴다. 숯불이 '불을 만드는 경험'이었다면, 가스불은 '불을 사용하는 편리함'이었던 셈이다. 이는 단순한 연료의 교체가 아니라, 불이라는 현상 자체가 하나의 연료 공급 시스템으로 전환되는 사건이었다.
웨버의 공식 연혁은 1971년 '가스 바비큐 케틀'을 가스그릴 시장 진출작으로 기록하지만, 이 제품이 웨버의 대표 상품으로 자리잡지는 못했다. 1980년대 초 소비자들의 관심이 점점 가스그릴 쪽으로 옮겨가면서 위기감을 느낀 웨버는 회사의 역량을 집중해 새로운 제품을 개발했고, 1985년 마침내 '지니시스(Genesis)' 라인을 출시했다. 오픈 카트 구조, 도자기 코팅 그릴망, 특허받은 플레이버라이저 바, 버튼식 점화 장치를 갖춘 지니시스는 큰 성공을 거두며 웨버를 숯불 중심의 그릴 회사에서 숯과 가스를 아우르는 종합 아웃도어 쿠킹 회사로 확장시켰다. 정리하자면 1971년이 웨버가 가스그릴 시장에 진입한 원년이라면, 1985년은 그 진입이 비로소 성공으로 이어진 원년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를 지나며 바비큐를 둘러싼 산업도 함께 몸집을 불렸다. 그릴 본체를 넘어 커버, 도구, 소스, 시즈닝, 앞치마와 장갑, 야외 가구, 서빙 용품, 요리책, 로티세리와 스모커까지 — 바비큐는 더 이상 하나의 음식이 아니라 하나의 소비 생활 체계로 자리잡아 갔다.
9. 대통령의 식탁 — 바비큐 외교
바비큐가 남부의 지역 음식에서 미국을 대표하는 상징적 이미지로 옮겨가는 데는 린든 존슨 대통령의 역할이 컸다. 텍사스 출신인 존슨은 자신의 목장, 이른바 '텍사스 백악관'으로 불린 LBJ 랜치를 정치·외교의 무대로 적극 활용했다. 1963년 12월 29일, 존슨은 이곳에서 서독 총리 루트비히 에르하르트를 맞아 텍사스식 바비큐 만찬을 열었다. 포트워스 출신의 케이터러 월터 제튼이 이 자리의 요리를 맡았고, 이후 제튼은 존슨의 전속 요리사가 되어 전국 유세를 따라다니며 바비큐를 구웠다.
1964년 재선 유세 기간, 이런 방식은 하나의 정치적 전략으로 굳어졌다. 뉴욕 헤럴드트리뷴의 한 기자가 이를 두고 '바비큐 외교(barbecue diplomacy)'라는 표현을 처음 썼고, 뉴요커의 평론가 브렌던 길은 상징으로서의 이 바비큐가 1952년 애들레이 스티븐슨의 구두 밑창 구멍 사진에 견줄 만하다고 평했다. 여기서 강조할 것은 이 사건이 '백악관이 바비큐를 미국의 국가 요리로 공식 지정했다'는 식의 제도적 사건이 아니라는 점이다. 정확히 말하면, 1963~64년 LBJ 랜치에서 이뤄진 바비큐 외교는 텍사스 바비큐가 지역 음식문화의 영역을 벗어나 대통령의 식탁과 문화 외교의 영역으로 옮겨간 상징적인 사례였다.
10. 조리가 경기가 될 때 — 경쟁 바비큐의 탄생
1970년대 오일쇼크는 미국 사회 전반에 대체 에너지와 연료 효율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이런 시대적 분위기는 이후 펠릿을 비롯한 새로운 연료와 장비 기술이 발전하는 배경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 바비큐는 본격적으로 경쟁의 영역에 발을 들이기 시작한다.
1978년 테네시 멤피스에서 '멤피스 인 메이 국제 바비큐 요리 경연대회'가 처음 열렸다. 오르페움 극장 앞 주차장에서 소규모로 시작한 이 대회는 이후 '돼지들의 슈퍼볼'이라 불리는 세계 최대 규모의 바비큐 경연대회로 성장했다. 1980년에는 캔자스시티에서 '아메리칸 로열' 대회가 시작되며 경쟁 문화의 네트워크가 넓어졌고, 1985년에는 캐롤린 웰스를 비롯한 이들이 '캔자스시티 바비큐 소사이어티(KCBS)'를 설립해 심사와 규정을 표준화했다. 조리, 제출, 심사, 순위, 상금이라는 경쟁의 문법이 이때부터 자리를 잡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참가팀 수나 상금 규모 같은 세부 수치가 아니다. 그런 숫자들은 자료마다 다소 엇갈리는 경우가 많다. 정말 중요한 변화는 구조 자체에 있다. 바비큐가 '먹는 것'에서 '잘하는 것을 평가받는 것'으로, 조리라는 행위가 평가 가능한 경쟁 행위로 옮겨간 것이다. 이 지점이 바로 오늘날 이야기되는 '경쟁 바비큐(Competition Barbecue)'의 출발점이며, 나아가 '스포츠 바비큐(Sports Barbecue)'라는 개념이 뿌리내릴 토양이 마련된 순간이기도 하다.
다만 경쟁 바비큐와 완성된 형태의 스포츠는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경쟁 바비큐의 중심에는 참가, 조리, 제출, 심사, 순위, 상금이 있다. 반면 스포츠 바비큐는 여기에 선수, 팀, 경기 규칙, 심판, 리그, 시즌, 랭킹, 기록, 경기장, 관중, 방송, 스폰서, 팬덤과 같은 스포츠 산업의 시스템 전체를 더한다. 경쟁 바비큐가 '경쟁이 형성되는 과정'이라면, 스포츠 바비큐는 '그 경쟁을 하나의 스포츠 체계로 조직하는 과정'이라 정의할 수 있다.
11. 화면 속으로 — 미디어 바비큐와 세계화
1990년 멤피스 인 메이는 대형 규모의 바비큐 행사로 성장하며 굿모닝 아메리카, 투데이 쇼, CBS, 푸드 네트워크, USA 투데이, 월스트리트저널 등 주요 매체의 취재를 받았다. 경쟁 바비큐는 이제 하나의 이벤트를 넘어 미디어 이벤트가 되어갔다.
1990년대 이후 케이블 TV와 요리 프로그램이 확산되면서 지역의 바비큐 문화는 전국적인, 나아가 세계적인 콘텐츠로 옮겨갔다. TV와 잡지, 요리책을 거쳐 인터넷과 유튜브, SNS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피트마스터의 위상도 달라졌다. 과거에는 지역 사회에서만 알려진 장인이었다면, 미디어 시대의 피트마스터는 요리사이자 장인이며 동시에 선수이자 하나의 문화적 인물이 되었다.
스티븐 라이클렌 같은 저술가이자 방송인은 바비큐를 남부의 지역 음식에 가두지 않고 세계적인 조리 문화로 소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텍사스 힐컨트리식 브리스킷이 텍사스 밖에서 팔리고, 캐롤라이나 풀드포크가 전국 프랜차이즈의 메뉴에 오르는 등 지역 스타일 사이의 경계도 점차 흐려졌다. 바비큐는 이렇게 지역화에서 전국화로, 다시 세계화로 이어지는 길을 걸었다.
12. 가려졌던 이름들 — 흑인 피트마스터의 귀환
미국 바비큐사를 다시 쓰는 최근의 중요한 흐름 가운데 하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피트마스터들의 역사적 기여를 되짚는 작업이다. 그동안의 바비큐 역사 서술은 흔히 백인 소유주와 유명 레스토랑 브랜드를 중심으로 기록되어 왔지만, 실제로 조리 기술을 발전시키고 지켜온 것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아프리카계 요리사와 피트마스터들이었다. 애드리언 밀러의 『Black Smoke』는 이러한 역사 복원 작업을 대표하는 저작으로 꼽힌다. 이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미국 바비큐의 역사는 결국 음식의 역사이자 노동의 역사, 인종의 역사, 그리고 문화와 권력의 역사로 함께 읽어야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13. 맺음말 — 다음 질문, 스포츠 바비큐
이 모든 흐름을 하나로 압축한다면 이렇게 쓸 수 있을 것이다. 미국 바비큐의 현대사는 공동체의 큰 불이 교외 주택의 작은 불로 옮겨가고, 그 불이 숯과 가스를 거치며 산업화되고, 다시 경쟁과 미디어를 통해 하나의 문화 산업으로 자라난 역사다. 불이 놓인 자리는 마을의 광장에서 대농장으로, 교외의 뒷마당으로, 상업 레스토랑으로, 경기장으로, 다시 텔레비전과 인터넷 화면 속으로 계속 옮겨 다녔다. 그리고 그때마다 바비큐가 수행한 사회적 기능도 함께 바뀌었다 — 사람을 모으는 음식에서, 정치적으로 사람을 모으는 음식으로, 가족을 모으는 여가로, 경쟁자를 모으는 경기로, 시청자를 모으는 콘텐츠로. 그러나 그 핵심 기능 자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바비큐는 언제나 사람을 모아왔다. 달라진 것은 누구를,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모으는가 하는 문제였을 뿐이다.
경쟁 바비큐는 이미 참가자, 경기, 심판, 규칙, 점수, 순위, 상금, 대회, 지역 네트워크, 미디어의 관심이라는 기반을 만들어냈다. 스포츠 바비큐는 여기에 선수와 리그, 시즌과 랭킹, 기록과 관람, 방송과 산업이라는 완전한 스포츠 시스템을 더하는 다음 단계다. 이 구조가 완성될 때, 바비큐는 단순한 요리 경연을 넘어 하나의 스포츠 산업으로 발전할 잠재력을 갖게 된다.
다만 스포츠 바비큐의 의미를 상업 프로스포츠의 단순한 모방으로 좁혀 볼 필요는 없다. 바비큐는 본래 불과 음식, 시간과 기다림, 함께 먹는 행위와 나눔, 의례와 축제, 그리고 공동체를 모두 포함하는 오래된 행위였다. 그러므로 스포츠 바비큐가 갖는 진짜 의미는 경기장이나 방송권이 아니라, 인간이 불을 둘러싸고 함께 놀고 경쟁하고 먹고 이야기하며 관계를 만들어온 그 오래된 행위가 마침내 현대적인 스포츠의 형식을 갖추게 되는 과정에 있다. 음식이 스포츠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오래된 불의 의례가 스포츠의 형식을 획득하는 것이다.
연대표
시 기
사 건
1492~1526
타이노어 '바라비쿠' → 스페인어 '바르바코아'로 문헌 기록
17~18세기
원주민·아프리카계·유럽 정착민의 기술이 결합해 남부 바비큐 형성
19세기
정치 집회의 핵심 행사로 제도화 (링컨, 브루클린 대규모 바비큐 등)
19세기 말~20세기 초
텍사스·캐롤라이나·멤피스·캔자스시티 4대 지역 스타일 형성
1919~1951
헨리 포드의 목재 폐기물 재활용 → 킹스포드 숯 브랜드 탄생
1945년 전후~1950년대
전후 교외화, 백야드 그릴링 대중화
1951/1952
조지 스티븐, 웨버 케틀 개발(1951)·판매 개시(1952)
1958
웨버-스티븐 프로덕츠 공식 설립
1960년대 초
아클라, 상업적 야외 가스그릴 '엠버매틱' 개발
1963년 12월
LBJ 랜치에서 서독 총리 에르하르트를 맞은 첫 바비큐 국빈 만찬
1971
웨버, '가스 바비큐 케틀'로 가스그릴 시장 첫 진입
1978
멤피스 인 메이 국제 바비큐 요리 경연대회 시작
1980
캔자스시티, 아메리칸 로열 대회 시작
1985
KCBS 설립, 웨버 '지니시스' 출시로 가스그릴 시장 안착
1990
멤피스 인 메이, 대형 미디어 이벤트로 성장
1990년대~현재
케이블 요리방송·인터넷을 통한 전국화·세계화
2021
애드리언 밀러 『Black Smoke』 출간, 흑인 피트마스터 역사 재조명
참고 자료
Smithsonian Institution / National Museum of American History — Weber Kettle 소장 기록, Postwar Potluck: Grilling Out, Convenience Cooking, and Other 1950s Food Trends
Smithsonian Magazine — The Story of the Weber Grill Begins With a Buoy / Swilling the Planters With Bumbo: When Booze Bought Elections
Weber Grills 공식 연혁 — Our History / 65 Years of Innovation / The Evolution of the Gas Grill / The Kettle That Started It All
Wikipedia — George A. Stephen, Weber Inc., Kingsford (charcoal), Memphis in May, Barbecue in the United States
AmazingRibs.com — Barbecue Diplomacy at LBJ's Texas White House
Texas Monthly — Commanders in Beef (and Pork)
Barbecuebible.com — Black Smoke: African Americans and the United States of Barbecue (Adrian Miller 저서 서평)
KQED — Barbecue Is Everywhere for the Fourth of July. Here's Its Origin Story
BBQ Brethren Forums / Australian BBQ Alliance — 경연 바비큐 역사 관련 스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