思史 (6) Homo loquens (언어의 인간)

Shaka Chaa
2021-12-16
조회수 482

6-1. 크로마뇽인의 진실

 

 

그림 6-1 백인의 얼굴을 한 크로마뇽인


필자는 아직도 크로마뇽인에 대한 진실을 풀지 못하였다. 구석기시대의 비너스 뿐 아니라, 알타미라의 동굴벽화와 같은 암채화(벽에 색깔을 넣어 그린 그림)는 시베리아 남부지역을 거쳐, 내몽고, 중국북부 지역까지 광범위하게 존재하므로, 이 암채화의 문화는 중부시베리아를 횡단한 수렵민인 우랄-알타이어족 문화의 분포양상을 그대로 드러낸다.

 

 

반면 한반도에서는 암채화가 아니라 암각화가 발견되고, 역시 만주를 지나 북부시베리아지역에도 분포하기 때문에 암각화의 경로는 어로민족인 한반도 기원의 에스키모어족 문화의 분포양상을 가진 것으로 짐작할 수가 있다. 다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2~3만 년 전 빙하기의 도래에 따라 아마도 다시 바다로 내려가고 남아있는 일부 크로마뇽인이 유럽 지역으로 몰려온 알타이어족과 혼혈화되어 바스크인 문화에 흡수되었을 뿐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에스키모어는 포합어에 속한다. 포합어는 동사를 중심에 두고, 그 앞뒤에 인칭이나 목적어가 붙는 또 다른 특이한 문법구조의 언어이다. 이 포합어군에는 ‘아메리카인디언어’, ‘아이누어’가 속한다. 이것까지는 이해가능하다. 빗살무늬토기인(에스키모, 인디언)과 조몬토기인(아이누)의 오래된 혈연적 연관성을 입증한다. 훗카이도에 거주하는 일본의 소수민족 아이누인은 ‘동양의 백인‘으로도 오해를 받았다. 그런데, 황당한 사실은 바스크어를 여기에 분류하여 넣는다고 필자가 검색한 인터넷 백과사전에 나와 있었다. 분명 지난 장에서 이야기한 선사예술기행 저자는 동사가 뒤에 오는 알타이어라고 했는데…….

 

그림 6-2 백인같은 일본의 아이누인

 

바스크어를 찾아보았다. 어문학자들은 이 언어를 고대 이베리아어와 비교했고, 또 카프카스어와 비교했다고 한다. 사실 이들 언어와 공통점도 있지만 차이점이 더 많아 아직 뭐라고 정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카프카스어란 인도-유러피안어족이 흑해와 지중해지방에 이주해 오기 전부터 해당 지역에 원주민이 사용한 고대 언어이며 지금도 카프카스어를 사용하는 소수민족(러시아로부터 분리 독립하려는 체첸공화국내 소수 민족 언어가 이 분류에 속한다)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베리아와 카프카스의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고인돌’ 발견지역이다. 계보가 이어지지 않는가? 그렇다면, 바스크어의 진실은 무엇인가?

 

 

정말 크로마뇽인이 있기는 있었던 것인가? 크로마뇽인에 대한 생각을 아예 머릿속에서 지워보자. 지금까지의 정보를 종합하여 보면 동아시아에서는 에스키모어를 사용하는 한반도 유래 어로민이 선주민이었다. 그러나 유럽지역에서는 거꾸로 우랄어를 사용하던 수렵민이 선주민이었고, 어로민족은 이주민이 된다. 필자가 보기에 바스크어는 한반도와는 역순으로 혼혈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마지막 후보인 카나리아제도의 관체족이 고인돌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없으므로, 정말 크로마뇽인의 순수혈통을 가졌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들이 M130인류라면 카나리아제도에서 어로생활을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카나리아제도에서 고인돌이 발견되면 어쩌지? ;-) 그러나 언어학자들은 이들의 언어가 북아프리카 함어족인 베르베르어(모로코 등)와 연관성이 높다고 한다.

 

 

크로마뇽인 유골이 발굴되는 분포지역은 유럽과 북아프리카 바로 ‘지중해 연안지역(따라서 어로생활을 유추가능)’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꼭 팔이 다리보다 긴 원숭이 같은 백인종(크로마뇽인 발굴당시 실제로 팔이 다리보다 길었다는 보고가 있었다)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모나코의 그리말디인과 같이 한 때 흑인종의 조상으로 여겨졌던 유골도 있었다. 황석리에서 발견된 백인과 거제도 근처 연대도에서 발견된 흑인 유골의 발굴결과와도 유사하다. (한반도 중부는 백인이, 남부는 흑인이 살았을까? ;-) 크로마뇽인은 그 긴 세월 도대체 뭐하고 있었는가? 진실일까? ‘조작’일까?

 

 

6-2. 유럽의 민족구성

 

그림 6-3 새로운 유전자 이동지도 (출처: BBC)

 

오늘날 유럽의 민족구성은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유전자 이동지도에서 볼 때, 인도-유러피안어를 사용하는 종족은 3부류가 있다. 지중해인종 즉 북부아프리카의 함어족의 양갈래 중 하나인 라틴어족과 중부 유럽으로 이동한 켈트어족, 그리고 전혀 다른 족보를 가진 게르만-슬라브어족이다. 인도유러피안인 중에서 가장 먼저 도착하여, 지중해 문명을 꽃피운 사람들은 이동시기가 기원전 3,000-2,000년경의 그리스 인인 라틴어족이며 동시기 이집트 문명에 많은 영향을 받아 뒤늦게 형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두 번째, 중부유럽 및 영국까지 진출한 켈트어족은 이동시기가 기원전 800-600년이며 갈리아의 두 영웅을 그린 프랑스 만화, 그리고 아더왕 이야기 등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착한 그룹이 A.D. 400년경 훈족의 침략을 받아 이주하여, 현재 유럽인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게르만-슬라브족이다.

 

 

혈연적으로 따지면, M89형 조상에서 바로 지중해인과 켈트인이 분기되고, 게르만족은 셈어족의 후손이자 알타이어족과의 공통조상인 M45형에서 분기된다. 그런데 언어적으로 이들은 근연관계가 매우 가까운 ‘인도-유러피안어’로 하나로 묶여진다. 즉 ‘언어란 혈연이 아니고 통합된 문화 교류 및 역사 공동체의 결과’임이 이 경우에도 적용되어야만 한다. 그들이 상호 피를 섞지는 않았을 지라도……. 혈연적 연관이 큰 함셈어족과 라틴, 켈트어족의 언어차이보다 혈연적 연관이 먼 라틴 및 켈트어족과 게르만족의 상대적으로 가까운 언어차이를 고려할 경우에 그렇다.

 

 

현재의 이 인도-유러피안어는 더 광범위하게 분포하는데, 이란어족과 인도의 아리안족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 두 언어의 어순은 알타이어와 같이 주어-목적어-동사의 순이다. 힌두어를 사용하는 아리안족은 이란북부지방에 거주하다가 기원전 1,500-1,200년경 이란고원을 넘어 당시 인더스 문명을 구축한 드라비다-문다족을 남쪽으로 밀어내고 오늘날 인도의 최대어족이 되었다. 이란인의 경우는 이보다 이후인 기원전 1,000년경 역시 북쪽에서 내려와 이란고원에 자리 잡고 나라를 세운 페르시아에서 유래한다. (페르시아와 스키타이는 서로 전쟁을 하였는데, 영토개념 자체가 없어 김빠지게 하는 스텝지역의 유목민 전략으로 결국 스키타이가 이겼다. 이런 문화의 차이를 어찌 간과하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동일계열의 민족으로만 보는 것인가? 스키타이 후손은 다 어디로 갔는가?)

 

그림 6-4. 5,000년 전 (BC 3,000년) 이후의 기후변동과 민족이동

 

아마도 4,000~2,000 년 전 소빙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중앙아시아지역에 있어서의 농작물의 빙해 등의 요인이 아리안-페르시안족의 연이은 남하(3,500년 전~3,000년 전), 그리고 조금은 뒤늦은 시기(2,600년 전)에 역으로 더운 시기가 시작되면서 켈트족의 유럽지방으로의 북상을 촉진시킨 듯(추우면 남하하고, 더우면 북상함을 가정)하며, 1,600년 전의 더운 시기의 막바지에 사막화된 중앙아시아 흉노족의 발흥이 게르만 족의 유럽지방으로의 연쇄 대이동을 유발한 것으로 보인다.

 

 

흉노(훈족)는 오늘날 백인들이 사는 또 다른 우랄-알타이계 언어국인 헝가리와 관련 있으며 헝가리(Hun-gari)란 나라 이름에도 그들의 족적을 남겼다. 독일의 한 방송은 훈족의 모습이 우리나라 국보인 신라시대 기마인물상과 비슷하다 하여 그 뿌리를 신라 혹은 고구려에서 찾았으며, 우리나라의 사가들은 거꾸로 스키타이의 영향을 받았다는 서방 유래 문화라고 한다. 아무튼 어떻게 해석하더라도 광범위한 시베리아 횡단의 우랄-알타이어족의 흐름과 분류에 유럽과 인도만을 종단한 인도-유러피안이 낄 자리는 없는 듯하다. 참고로 그림 상 Little ice age(소 빙기)는 몽고족의 발흥과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림 6-6 유럽 및 중앙아시아 지도에서 보이는 산맥과 평야, 사막지대

 

아무튼 이 모든 정보를 종합하면, 이들 인도-유러피안이 거주하던 원래 지역은 지중해, 흑해-카스피해-아랄해를 포함하는 이란고원 북쪽의 서남부 시베리아 평야지대(근동이라는 기존 학설의 근거지)가 이들의 기원지임을 알 수가 있다. 유럽인종을 일컫는 코카서스 인종이라는 말은 흑해와 카스피해의 사이에 있는 지역을 의미하는데, 속설에 의하면, 이 지방에서 발굴된 유골이 가장 아름다워서 스스로를 그렇게 붙였다고 하지만, 실제로도 이 지방에서 채집-농경생활을 하던 인류였던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유전자이동 갈래, 이동 루트의 분포로 미루어 보아 카스피해 서쪽의 코카서스 지역 원주민은 켈트어족이었던 것 같으며 게르만-슬라브족이나 인도-페르시아어족은 카스피해 동쪽에 살았던 것 같다. 즉 커다란 내륙의 바다 같은 호수들이 산악 북부의 동일 언어문화권내에 인종적, 문화적 차이를 가져온 것이다.

 

 

순서대로 정리하면, 터키-이란 고원의 북쪽 지역은 서쪽부터 그리스, 로마어족-(흑해)-켈트어족-(카스피해)-게르만, 슬라브족-(아랄해)-페르시아, 아리안족이 되는 순이다. 그런데, 세계 최초의 농경문명이 일어났으며, 3대문명지이기도 하며 지중해 및 터키-이란고원의 ‘남 쪽’ 지대인 아프리카북부(이집트)-중동(메소포타미아)-파키스탄(인더스) 지역은 지리적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오늘날 보다시피, 세계에서도 가장 황량한 사막지대라는 것이다.

 

 

6-3. 사막화와 문명의 발생

 

 

사막화의 원인은 무엇일까? 이것은 바람의 방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중동지방의 경우에는 북쪽에서 불어오는 편서풍이 터키-이라크-이란의 고원지대를 통과하면서 그 북쪽사면에는 많은 비를 내려 거대 호수가 형성되고, 남쪽에는 강우량이 떨어져 사막화의 경향을 가지게 되었고, 반대로 아프리카 북부의 경우에는 이베리아반도 및 아프리카 북부의 아틀라스 산맥으로 막힌 편서풍과 인도양에서 불어오는 동풍의 적도풍이 이디오피아 고원지역에서 막히는 복합적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 지역이 사막지대였던 것은 아니다. 빙하기가 물러나면서 기후가 온화해지면서, 드넓은 초원지대를 형성했을 수가 있다. 여전히 사막지대에서 촬영하는 고대 이집트 영화나 구약성서 영화를 초원을 배경으로 찍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1만 년 전부터 시작된 사막화의 경향은 큰 강을 끼고 있는 평원에 인구가 몰리면서, 최초의 농경이 발생한 원인이 되었다. 채집 가능한 ‘식량자원의 감소’가 농경발생의 원인으로 보아야 한다. 마치 더 동북쪽의 내륙지방의 사막화가 수렵민의 정착을 위한 사방으로의 이주를 촉발한 원인과도 같으며,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침팬지랑 구분된 이유와도 같은 것이다.

 

 

반면에 이 고원지대의 북쪽지역은 지금 보는 바와 같이, 흑해, 카스피해, 아랄해와 같은 거대한 호수는 그렇게 큰 사이즈가 아니었을 것이며, 강우량이 많고 비교적 온화한 지역이어서 인도-유러피안어족은 매우 장기간 이 풍요한 땅에서 ‘채집’생활에 의존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상대적으로 이 지역 인류의 농경문화가 타 지역보다 늦어진 이유가 된다.

 

 

이것은 일찍이 이집트 문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지리적, 혈연적 교역 요건을 갖춘 라틴족이 거주해온 따뜻한 지중해 북쪽연안의 경우에도 상대적으로 강우량이 많고 알프스산맥이 매서운 북풍을 막아주는 지리적 요인도 문명의 발달이 비교적 늦은 한 이유가 될 수 있다. 물론 현재 카자흐스탄 등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산맥의 북쪽 지역 역시 현재는 사막화(계속되는 기온의 상승과 내륙지방으로서의 특성으로 보임)가 진행 중이지만 당시는 상대적으로 더욱 풍성한 산림과 초원지대로 이루어진 기후 환경을 가졌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큰 강을 낀 문명의 발생은 농경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주목해왔다. 농경생활로 비약적인 생산력을 이루게 된 인류는 잉여의 발생에 따라 계급사회를 이루고 대규모 관개에 따른 소위 밀집형 주거상황에서 발생하는 아시아적 공동체에 기반을 두어 총체적 노예제라 불리는 고대 국가 형태를 형성하게 되었다. 총체적 노예제란 1인 군주를 위하여 모든 국민이 ‘노예’와 같은 예속적 신분을 가지는 그러한 체제를 의미하는 용어로 마르크스주의 사적유물론에 따라 전형적 노예제 사회인 그리스-로마사회에 대비하는 의미로 당시의 아시아 지역(이집트, 페르시아 및 중국, 한국?)의 사회체제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 이론에 의문을 던진다. 물론 농경생활이 계급사회나 문명의 발생에 필요조건이 될 수는 있으나 충분조건이 되지 못함은 ‘우주인’이 건설한 것으로도 여겨지는 수메르인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듯 하기 때문이며, 이 이야기는 곧 그 이전의 수렵생활의 경험을 축적한 또 다른 인류의 이동에서 비롯된 문화 충격의 영향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적 발굴로 미루어 메소포타미아지역의 농경신석기문화는 무려 1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오래된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 지역의 중심부에 출현한 6-5천 년 전의 수메르문명은 하나의 문화단절과 비약을 가져오게 되었다. 수메르인은 주변인과는 차원이 다른 도시문명을 구축하였고, 문자를 발명하였으며, 법률을 갖추었고, 대규모 인력을 동원한 지구라트(피라미드) 건설공사를 한 절대왕조의 계급사회를 이루었다.

 

 

피라미드 건설은 고산지방 출신 인류에게 어머님의 품과 같은 산에 대한 아련한 기억을 안겨주며, 그들의 단결심을 고취하는 수단이 되지만 오늘날 우리사회의 기술발전 없이 단순 부가가치와 생산성을 의도적으로 높이기 위한 대규모 아파트 건설공사처럼 절대왕권을 강화하고 민중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양면적인 수단인 것이다.

 

 

1,000여 년간 지속되어온 수메르인의 문화는 주변의 셈어족이었던 아카드인에 의해 파괴적으로 멸망당하였지만, 아카드왕조에 의하여 성공적으로 복제되고 빠르게 지역화 되어 양 방향으로 퍼져 나갔다는 것이 농경신석기문화를 설명하는 백과사전의 구절에 나와 있을 정도이다. 이 문화전파의 결과가 나머지 지역의 이집트, 인더스문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터키-이란고원의 가로 막힌 지형적 영향으로 그 문화전파의 혜택을 차단당한 채, 인도-유러피안족의 ‘원시농경’은, 유목생활도 더불어 한 아리안이나 페르시아인(문장어순이 이를 반영함)처럼 스스로 남부지방으로 그 주거지를 이동하여 선주민 및 주변주민의 문화를 흡수하지 않는 한, 기원후 4세기까지도 정체상태로 지속되었다. 훈족에게 강제로 터전을 빼앗기고 이주한 유럽의 중세암흑시대까지 포함하면 매우 장구한 세월이 될 것이다. 농경이 문명구축의 충분조건이 아님은 이것으로도 확인된다.

 

 

어떻게 수메르인이 그렇게 비약적인 문명을 건설할 수 있었을까? 고생스러운 수렵생활의 축적된 경험도 있었겠지만 그것 역시 필요조건은 되더라도 충분조건을 형성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아시다시피, 수렵(유목)은 농경보다 생산력이 떨어지는 경제활동이다. 더군다나 수렵생활의 경험이 새로 시작된 농업에 얼마나 도움을 주는지는 의문이다.

 

 

필자가 주목하는 결정적 동기는 ‘문자의 발명’이다. 인류가 다른 동물과 차원이 다른 발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20만 년 전의 FOXP2 유전자변이에 의한 ‘언어생활’ 때문이었다. 단순히 구전으로 세대 간에만 전달되었던 언어식 교육의 영향은 문자가 발견된 이후, 해당 세대뿐 아니라 그 이전 세대들의 ‘축적’된 지식과 정보의 량을 기하급수적으로 후세에게 빠른 시간에 전파할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이 바로 지식의 폭발적 증가를 가져와 농경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올 수 있게 한 밑거름이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산업사회를 뛰어넘는 정보사회의 인터넷의 발견은 이러한 경향성을 더욱 증폭할 것이라 생각한다.

 

 

6-4. 문자발명의 이유

 

 

그런데, 한발 더 나아가보자. 왜 문자를 발명했을까? 수메르의 문자는 처음부터 특수한 쇄기문자였던 것은 아니다. 바로 이집트나 중국에서처럼 상형문자 즉 그림문자에서 출발한다. 사물의 형상을 표현하는 그림문자가 필요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림 6-7 수메르문자의 변천과정

 

만일 어떤 인류든 그들 자신 집단만으로 스스로 전달할 수 있는 말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 문자를 발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필자의 가설은 최초의 문자란 말이 통하지 않는 두 집단 간의 의사교환의 수단이었으리라고 본다. 가장 간단한 의사소통의 수단이 바로 사물의 형상을 표현한 그림이 아니겠는가? 수메르인이 우랄-알타이어계임이 불확실하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함-셈어족하고는 다른 언어체계를 가진 이주민이며 주변 민족과 상호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었음은 문자발명의 이유가 충분히 된다. 근처에 사는 언어그룹 중에서 인도-유러피안처럼 굴절어(문법형태에 따라 단어가 변화되는 언어)도 아니고 수메르어가 한국어와 같은 교착어(조사나 첨사를 부가하여 문법을 표현하는 언어)라면 그들이 과연 누구였겠는가?

 

 

인디언들의 결승문자는 동일 집단 내에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약속된 기호이다. (전남 영암지방에서 유사한 결승문자가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인디언과 한국인의 연관성도 높다.) 이것은 상호 말로서 이루어져야 하는 ‘약속’이 없다면 해독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림문자는 말이 통하던 아니하던 누구든지 그 문자가 의미하는 바를 바로 바로 이해할 수 있는 장점이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림문자는 역사와 문명이 다른 두 이질적인 민족문화의 융합에 의해서 최초로 발생한 것임이 필자의 가설이다. 페니키아의 알파벳도 다양한 문화집단간의 교역인 상업에 의존하던 생활양식의 필요에 의해서 발명된 것이다. 한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무엇인가 이질적 집단 간의 의사소통수단의 의미로서, 만들어진 것으로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 (중국인 혼자 한자를 만들지 않았다면 어떤 민족이 추가로 필요했을까?)

 

 

스키타이인이 문자를 남기지 않아 어떤 언어를 사용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기마민족이자 유목민족이었던 그들의 문화전통으로 미루어보아 ‘고도의 문화 예술수준(스키타이 유물은 그리스 문화를 뛰어 넘을 정도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문자를 발명할 ‘필요’ 자체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생활환경자체가 전혀 바뀌지 않았는데, 이민족과 대화를 나눌 필요가 무엇이 있었겠는가? 설혹 일부 농경생활도 하였고, 인도-유러피안족과 혼혈이 일어났더라도 단지 약탈의 결과 일뿐 그들의 문화를 따를 필요는 굳이 없었을 것이다. 페르시아의 황당한 스키타이와의 전쟁은 고정된 영토를 비롯한 어떤 사물에 대한 집착 자체가 없었음을 의미한다. 그들을 분노케 하는데 필요한 것은 ‘조상무덤에 대한 파괴행위’뿐임을 알게 되었지만, 페르시아황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런데, 만일 필자의 가설이 맞는다면 한자처럼, 그림문자는 바로 뜻글자의 형태로 발전해야 한다. 그림자체가 발음과 달리 하나의 완성된 의미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 수메르의 글자는 마치 결승문자처럼 해독하기 어려운 쇄기형 문자로 발전하였고, 수메르인들의 말 그자체를 표현하는 소리 문자로 발전하게 되었다.

 

 

수메르인이 사용한 소리문자 방식은 전화가 잘 안 들릴 때, “새벽의 ‘새’, 우산의 ‘우’, ‘새우’ 한 상자 갖다 주세요.” 하는 표현처럼 전혀 의미가 맞지 않은 단음절을 상호 연결시켜 암호처럼 한 단어를 표현한 것이다. 영어의 알파벳도 자모로 구분되지만, 각각의 상형은 그러한 영향을 다분히 받은 그림 문자에서 출발한다. 예를 들어 문자 A는 소의 형상을 뒤집은 형태를 가지는데, 소를 의미하는 셈족 언어인 ‘알렙’에서, B는 집의 형상을 모로 세운 형태를 가지는데, 이는 집을 의미하는 ‘베이트’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나 역으로 오늘날 최초의 그림문자인 수메르문자는 아직 해독이 불가능하지만, 표음문자체계의 쇄기형의 문자는 거의 모두 해독되어 그 유명한 ‘길가메쉬의 대서사시’가 출판될 정도에 이르렀다. 혹자는 5,000년 전 인류가 몇 가지 단어만을 말했을 것이라 무시하는 사람-황당하지만 필자가 인터넷을 통해서 만난 사람이 실제로 그러한 주장을 하였다.-도 있지만, 대서사시를 쓸 정도라면 당시 인류의 언어생활의 수준은 현대인의 어휘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이집트의 최초 상형문자도 제1왕조 말기(BC 1,300년)에 메소포타미아와의 접촉을 통하여 수메르인으로부터 문자개념을 빌려왔다고 한다.

 

 

필자는 한자와 수메르문자의 차이점을 주목하고자 한다. 장기간 수렵생활을 해오던 초기 수메르인 들이 정착하기 위해서는 최초의 농경문화를 구축한 주변의 민족으로부터 농경기술을 배워야 했다. 그것이 상형문자를 발생시킨 동기가 되었을 것이지만, 그들은 성공적인 농경사회로의 정착 이후 그들이 발명한 문자 체계를 곧바로 자신들만의 의사소통을 위한 문화로 바꾸고 주변의 야만족과 구별되는 높은 담장 안에서 그들만의 문명 생활을 누린 것이다. 마치 다른 사람들은 이해 못하는 암호화된 문자처럼…….

 

 

이러한 문자의 암호화 기능은 이집트의 계층마다 서로 다른 상형문자의 분화에서도 잘 나타난다. 문자발명에 의한 잉여생산물의 발생이 문자 그 자체의 독점을 가져와 일종의 계급성, 폐쇄성을 반영하게 된 것이다. 같은 표음문자라도 민본주의에 입각한 한글과는 그 의미가 180도 다른 것이다. 한자가 어려워진 것도 결국은 계급화의 반영이다.

 

 

수메르인은 멸망 후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리게 되었지만, 그들의 문자, 그들의 신앙 등 모든 문화를 주변에 전파시켰고 아카드왕조는 이를 성공적으로 복제하고 주위에 전파하여 그야말로 찬란한 초월적 절대주의의 신관을 가진 고대 오리엔트 문명을 꽃피우게 되었다. 그러나 오리엔트 문명은 사막화에 따른 떨어지는 지력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찬란한 문명은 과거의 영화가 되었다.

 

 

6-5. 갑골문과 한국어

 

그림 6-8 갑골문 천부경

 

그림은 우리 민족 최고의 경전이라는 갑골문으로 된 천부경이며, 고려말 육은 중 하나인 농은 민안부 선생의 유집에서 발견된 것이다. 천부경을 해독하자는 것이 아니다. 이 천부경을 발굴 소개한 대종언어연구소의 박대종씨는 1899년 은허에서 갑골문이 최초로 발견되었고, 후한의 고문학자 허신조차도 몰랐던 글이었는데 어찌 600년 전의 중국도 아니고 고려의 한 유학자 문집에서 갑골문이 발견되는지에 대한 궁극적 의문을 던졌다.

 

 

박대종씨는 역시 한단고기의 일부서인 발해 문왕의 ‘삼일신고봉장기’에 기자가 부여의 법학자 왕수긍을 초빙하여 삼일신고를 은문으로 쓰게 하여 그것을 읽었다는 기록에 근거 이 갑골문 천부경이 당시에 작성된 것을 후대의 서예가가 정밀 모사한 모사본이라 추정하였다. 삼일신고 역시 천부경과 마찬가지로 진위를 의심받는 고조선시대의 종교적 경전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일부 박대종씨가 해석 수정한 몇 글자를 제외하고 기존의 최치원이 번역하였다는 천부경(한단고기와 함께 계연수라는 분이 묘향산에서 발견하고 전한 대종교의 경전)과 그 내용과 형식이 어찌 그리 똑같은가? 왕수긍이던 최치원이던 번역자에 따라서 문장이나 형식이 달라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고조선이 한국인의 나라라면, 천부경의 원본이 중국말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알타이어를 사용하는 배달민족의 한국어로 이루어진 것을 전제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이것을 단군왕검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고 어찌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최치원이 본 것이 혹시 이 갑골문천부경이 아니던가?

 

 

일부 녹도문으로 된 천부경이 있다고 하며 그것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하나같이 이렇게 똑같이 번역할 수는 없으며, 또한 녹도문이 한문이 아닌 이상 이렇게 번역될 수는 없으며, 최치원이라 하더라도 그 의미의 상세한 추가 전달 없이 해석이 구구난방 발생하도록 단순히 9×9의 정형화된 틀로서 짜인 구조로 전달할 수는 없다. 녹도문이란 한자이전의 고대 한민족의 전설상의 문자이다. 일부 암각화에서 발견된 추상기호를 녹도문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해석도 못하는데 정말 한국어일까? 필자의 추론이라면 이것은 녹도문과 관계없는 암각화의 주인의 글 즉 포합어인 고대 ‘오스토로네시아어’여야 한다.

 

 

그렇다면, 갑골문이 중국어라는 것이 확실한 이상, 또 단군왕검이 최치원의 비문과 왕수긍 은문의 동일한 원본을 제작한 사람이라면, “단군왕검은 중국어를 사용한 중국인이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또한 단군왕검이 만일 직접 이 천부경을 작성했다면, 갑골문의 기원은 은나라 이전으로 소급되어야만 한다. 단군왕검이 전설상의 하나라 보다 이전의 요임금과 같은 시기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국조가 중국인이라 하여 흥분하지 말자. 한단고기 등에 의하면, 단군왕검은 웅심국(熊心國, 곰의 나라임)의 비왕(裨王) 즉 왕을 대신하여 섭정을 행한 사위였다. 그가 변경지방에 시찰을 간 사이 임금이 붕어하고, 중국의 시조인 요가 그 틈을 타 웅심국의 정권을 취하였다. 이에 단군왕검은 구 배달국의 수도였던 아사달로 이주, 그곳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을 세운다. 이때가 기원전 2,333년이다. 그렇다면, 요가 탈취한 웅심국은 바로 현재 중국의 핵심지역이니 당연히 단군은 중국인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지난 장에서 필자는 우랄-알타이어족이 아닌 중-소 국경지대의 아무르강가의 에스키모(에스키모-알류트어족)가 북미대륙으로 이주한 시점이 기원전 2,000년이라는 자료를 기준으로 계산하여, 어로민족이었던 포합어의 몽고족, 퉁그스족이 바로 고조선의 건국 시기 이후 우랄-알타이어족의 일원으로 변함을 이야기한 바 있다. 하나 더 포함한다면, 이 시기 이후의 한반도의 왜인도 마찬가지로 고조선의 일원으로서, 우랄-알타이어족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안타깝게도(?) 당시 일본 땅은 포함되지 않아 일본의 선주민은 그냥 포합어의 ‘아이누족’으로 남았다. 말갈족으로 생각되는 비서갑의 하백녀가 두 번째 부인이 되는 것도 아사달에 고조선을 건국한 시기이다. ‘통혼’을 통한 수평적 결합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왜 중국어족이 아니고 우랄-알타이어족이 될까? 그것은 기원전 3,000년경 고조선 이전에 발해만에서 이미 변두리(?)의 어로민족을 만나기 전에 알타이어의 배달족과 중국어를 사용하는 곰족의 ‘통혼’을 통한 수평적 결합(맥-貊, 사실은 이들 역시 농경-어로민족의 혼혈로 보임. 그 이유는 다음 장에서 서술)이 있어왔기 때문이다. 이 지역(신시배달국)에서 ‘티벳-중국어와 우랄-알타이어’를 혼용하여 사용하는 고대 ‘한국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러니, 배달국이 망하고 난 고조선 이후에는 발해만에서 만주, 한반도, 연해주, 시베리아영역으로 확장되어 몽고어, 퉁그스어, 일본어는 모두 한국어의 영향으로, 포합어인 오스트로네시아어도 뒤섞여 있는 채로 우랄-알타이어 형식의 문법구조를 갖추게 된 것이다. 골치 아프겠지만, 한자어를 제외하고 순우리말로만 알고 있던 각 단어의 기원이 북방계인지 남방 오스트로네시아계인지는 언어전문가에게 맡기자.

 

 

반면 전쟁의 신인 치우천왕(한국계인지 중국계인지는 후술) 이후 구리(九夷, 부족이 9일수도 있고, 추상적의미도 있을 수 있다.)라는 확장된 부족연합체 형식의 나라의 중심지로서 단군왕검의 출신국인 웅심국이 속해 있던 황하유역은 황하문명을 이룩한 중국의 기원지가 되는 것이다. 필자생각은 치우로부터 단군왕검까지 몇 대 되지 않는 걸로 보아, 지배층은 고대 한국어를, 피지배층은 중국어를 쓴 것 같다. 왜냐하면, 발해만과 달리 황하유역은 ‘통혼’(환웅과 웅녀의 결혼)이 아닌 ‘전쟁’(치우와 황제간의 전쟁, 후술)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전쟁결과로 인한 신분제는 언어를 통합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예가 인도이다. 그러니 단군왕검은 사실은 중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지배층의 한국어족이 되는 것이다. ;-)

 

 

‘옛날 옛적’이란 단군조선이전의 예(濊, 밭농사를 하였으며 중국어를 사용하던 호랑이 토템의 또 다른 우리 민족의 조상, ‘호랑이 담배 먹던’이란 이들이 터줏대감 즉 주인 노릇하던 때) 시대를 의미하고, ‘고릿적’이란 청구배달국 즉 한국, 중국어 혼용의 구리시대를 의미한다. 물론 담배는 임진왜란 이후에 수입되었지만 그 전부터 호랑이를 주제로 한 유사한 의미의 구전 속담은 있었을 것이다. 언어학적 의미로는 호랑이를 결부시킨 태고 시절의 의미에 현재를 의미하는 ‘담배’의 보조관념을 결부한 은유법의 관용어라 한다. 또한 고리가 조선 이전의 고려시대라는 통상의 해석이 있지만 아주 오랜 ‘옛날’이라는 의미와 통하려면 고리는 적어도 고조선 이전이어야 한다. 문명의 개화가 이루어지기 전이라는 의미도 있다. 조상이 생각하던 문명이란 무엇인가? 적어도 물질적인 것은 아니다.

 

 

쌀밥을 먹고 젓갈과 김치를 담가 먹으면서, 우리는 농경(예, 맥)과 어로(왜인)를 하며 살았던 어머니 같은 남방계 조상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것이 북방계 단일민족주의를 주창하는 일부 재야사가들 주장처럼 ‘쥬신’이라 혀 꼬부려 사투리처럼 발음하지 않고 당당히 우리의 한자발음 그대로 ‘조선’이라 발음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언어가운데 알알이 박혀 분리할 수 없는 ‘한자어’도 역시 ‘우리 말’이다.

 

 

필자는 문자발생의 이유를 어느 한 민족의 독자적인 발명품이 아니라, 두 이질적인 문명의 교류와 융합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본다. 한자 역시 마찬가지다. 세종대왕이 아니라, 3대 단군 가륵이 한글의 기원인 가림토를 만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쓰였는지는 모르지만, 또한 사실이던 아니던,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포합어의 어로민족과의 통합)가 있었다. 한글을 만들 때 참조한 만주의 음운학자가 가르쳐준 것이 여진족의 문자체계로 사용되어오던 고대 가림토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 #교육·학문



이 글은 자연과학분야의 전문가이면서 '샤카스바비큐'의 어드바이저인 이영득 박사의 개인블로그에서 옮겨 저장한 글입니다.

바비큐는 인류학에서 생존과 진화에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연구자료로 활용하고자 이 곳에 자료를 옮겨 놓습니다.

기존의 일반화된 견해와 다른 부분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런 면에서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느끼는 샤카의 의도와 일치하므로 연구자료로 활용 계획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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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Sha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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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ka's Outdoor & Barbecue Studio / 샤카스 아웃도어 바비큐 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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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rbecue Commentator / 바비큐 해설가

Koea Outdoor & Barbecue Association / 사단법인 대한아웃도어바비큐협회 회장


"Shaka"는

국내 최초의

Real Barbecue 커뮤니티를 개설하고

바비큐 문화와 아웃도어 문화의 새로운 장을 열어왔다.


현재는 BArbecue Promoter 겸 Performer로 활동하고 있으며,


2013년 tvN에서 방송된

창직서바이벌 프로그램인

『크리에이티브 코라아』에 출연해


『프로바비큐어』라는 창직명으로

최종 Top5까지 진출하면서

세계 최초로

『프로바비큐어』라는 직업을 창직하고

바비큐의 스포츠화를 통해

새로운 문화와 산업을 만들어 가고 있다.


또한,

Y대학교에서

국내 최초로

Real Barbecue를 강의를 하는

교수를 역임했으며, 


미국에서 1959년부터 이미 자리 잡은

Barbecue Competition 문화를

세계 최초로

대한민국에서

Sports Barbecue로 재탄생 시키면서

국내

수 많은

경기대회를 주최, 주관하고 있다.


Sports Barbecue 문화의 중심에 설 

Professional Barbecuer 양성을 위해 

『Korea Barbecue University』를 설립하였으며

선수 양성 과정과

다양한 Barbecue Class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성으로

아직도 호모에렉투스를 기다리고 있는

원시주의자이며,

스포츠 바비큐 문화를 통해 

잃어버린 인간성과

무너지는 공동운명체 복원을 꿈 꾸는 

놀이주의자

『호모날리리언스(Homo-Nallarians)』다. 


 현재는

『사단법인 대한아웃도어바비큐협회』 회장을 맡고 있고,


2018년

서울에서 창립총회를 마친

『국제아웃도어바비큐스포츠연맹(IOBSF)』 사무총장으로

스포츠 바비큐의 세계화에도 단단한 밑거름을 놓고 있다. 


아울러

스포츠 바비큐 문화를 통해

4차산업 혁명 이후 도래 할  놀이혁명인

5차 산업혁명을 꿈꾸는 사회혁명가이기도 하다. 


작가로서도 활동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리얼바비큐 교과서인 『Shaka's Barbecue Primary』 (2015년, 교문사)와 

국내 식육게릴라 4인이 공동으로 참여한

『고기실무전』(2019년, 팜커뮤니케이션)이 있다.

Planning & Business Director Shaka Cha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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