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이베리아인과 고인돌
“서유럽 최초의 인류인 크로마뇽인은 최후의 마지막 빙기(2만 년-1만 년 전)에 숫자가 줄어들어 따뜻한 기후의 스페인, 이탈리아, 발칸반도 지역으로 물러났다가 빙하기가 후퇴하자 북쪽과 서쪽으로 이주, 오늘날 서유럽인의 최대 유전자 마커(M343-3만5천 년 전에 발생)를 형성하였다.”
이 이야기는 스펜서교수의 유전자프로젝트가 진행 중인 내셔날 지노그래픽 사이트의 설명이다. 또한 미토콘드리아 유전자 증거를 처음 소개하여 베스트셀러가 된 ‘이브의 일곱 딸들’의 저자(브라이언 사이키스)도 “현대 유럽인의 80%는 4~5만 년 전에 유럽에 살기 시작한 수렵인(크로마뇽인)의 후손이라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유럽인의 대다수가 불과 1만 년 전에 근동지방으로부터 이주해온 농경인 들의 후손이라는 기존의 학설을 뒤집었다.”고 한다.
그림 5-1 M343 이주그림 및 연도표시 (출처: 내셔날 지노그래픽)
M343 마커는 윗 그림처럼 인도-유러피안어족인 M173에서 분기한 새로운 아형의 이름으로 게르만족을 일컫는다. 이들은 무려 4만 년 전에 다른 민족 들이 한 곳에 오래 머문 채 이동하기도 전에 일찍이 시베리아 평원을 거쳐 이베리아반도까지 진출했다가 다시 유럽지역으로 퍼져 살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전자 이동지도 상으로 이 게르만족은 시베리아 및 아메리카대륙으로 이주한 M242마커의 공동조상인 M45에서 분기한다. M45를 찾아보았다. M45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의 중앙아시아인의 사진(돌궐, 흉노의 후예, 우랄-알타이어족)이 나왔다. 그리고 M242는 시베리아 에스키모들의 사진이 나와 있고 그 분기는 겨우 2만 년 전이다.
그러니까 이 그림 상으로 보면, 4만 년 전 유럽에 출현하여 인도-유러피안어를 사용하는 크로마뇽인의 조상은 중앙아시아의 알타이어족 투르크계 유목민의 후손이었던 셈이다. 참으로 대단하다. 이 영국의 유전학자들이 박박 우기면, 기록으로 명백히 남아있는 인류 역사도 막 바뀌어 버리는구나. 그럼 겨우 기원 후 4세기(1,600년 전)에 훈족의 침략을 받아 대거 이주한 게르만-슬라브족 대이동의 역사가 무려 4만 년 전(네안데르탈인도 살고 있던 때이다)에 일어난 역사였던가? 고선지 장군이 토벌했던 돌궐족(투르크인)이 중앙아시아로 몰려가서 무려 4만 년 전의 유럽 크로마뇽인의 조상이 되었던가? 그리고 그 돌궐족에서 에스키모가 나타나 1만5천 년 전에 얼어붙은 베링해를 건너 중남미 인디오의 조상이 되었는가? 더욱이 그림 5-1은 M173에서 같이 분기하여야할 M17 돌연변이형(슬라브 및 이란, 인도 아리안족)은 표시도 되어 있지 않다. 빙하기 후퇴 후에 다시 북유럽으로 가서 M343 돌연변이형을 일단 취소하고 M173에서 다시 M343과 M17의 두 개로 나뉘는가?
필자 지금까지의 논리 전개를 유전자 정보에 상당부분 의존해왔다. 그러나 이 지독한 유럽인 과학자들의 ‘서구 중심주의’에는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다. 유럽형 단일민족주의자를 보는 듯하다. 그렇게도 크로마뇽인의 후손이 되고 싶은가보다. 크로마뇽인이 식인습관이 있었던 걸 알까나?
필자는 이 경우에도 카오스이론의 적용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혼혈이 일어날 경우, 극히 적은 확률의 크로마뇽인의 mtDNA가 이후 이주민의 전체 mtDNA를 바꿀 가능성을 (실험을 제대로 했는지 모르지만) 브라이언 사이키스 박사는 고려하고 있었어야 한다. 2장에서 설명한 바 있는 해안가 mtDNA를 유럽지역에서 발견하였다면(‘이브의 입곱딸들’이란 책의 제목은 mtDNA분석에 기초함을 의미한다), 머콜리 박사의 설명처럼 호주로 간 오스트로네시아 어족 중에서 4만 년 전 시나이반도를 통하여 유럽지방으로 다시 올라간 크로마뇽인들과 훨씬 후에 이주한 현재의 M343 Y염색체 돌연변이형 인류인 게르만족의 혼혈이 일어났을 가능성만 언급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필자 역시 크로마뇽인에 대해서 생각하다 머리에 쥐가 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고인돌 때문이다. 크로마뇽인은 4~1만 년 전의 범위에 유럽에 존재하였다. 크로마뇽인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은 동굴생활을 하였고, 남아 있는 동굴벽화로 추정컨대, 어로라기보다는 명백히 수렵에 의존한 원시인들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주구장장 논증했듯이 어떤 인류든 자신의 ‘주 식생활 문화 습관’을 바꾸기는 그리 쉽지 않다. 그럼 유럽, 영국, 지중해, 그리고 북아프리카 등지 뿐 아니라 흑해 연안까지 분포하는, 분포로 미루어 ‘어로 생활’을 반영하는 해안가, 강변의 고인돌, 환상열석 등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림 5-2 고인돌분포도 (출처: 변광현, 원시예술)

그림 5-3 러시아 카프카즈-흑해연안-의 고인돌 (출처: 변광현, 원시예술)

그림 5-4 미국의 고인돌 (뉴욕, 인터넷 검색)
남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에도 ‘오스트로네시아어족’과 고인돌이 있다. 그림 5-4에서 보듯이 고인돌이 북아메리카 뉴욕근처에서도 발견되었다. 이건 이해하겠는데 유럽과 지중해 지방은 참으로 미스터리다. 아무리 생각해도 빗살무늬토기의 경우처럼 한반도의 고인돌 축조 인류가 북해를 돌아 참으로 멀리도 이주했다는 생각만 든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매우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배가 있었다. 이동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다만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되는 시베리아 북부 타이가지역에서는 고인돌이 발견되지 않는 것이 미스터리다. 정말 없는 것일까?
아니다. 한반도 고인돌의 ‘기존 북방유래설’을 입증하는 근거로 제시되는 시베리아 카라스크 돌널무덤(BC 1,300년 유적,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되는 북해로 흐르는 예니세이강 유역)이 사실은 거꾸로 한반도로부터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이 돌널무덤 양식도 고인돌과 함께, 한반도 및 만주에서 널리 발견된다. 그러니까, 한반도의 고인돌 축조문화 인류도 지역, 시대에 따라 가지 가지 양식을 가졌던 셈이다.

그림 5-5 한반도에서 발굴된 돌널무덤
그럼……. 북위 55°이상의 유럽 북부가 아니라 남부 및 지중해 지방에서도 발견되어야할 빗살무늬토기는? 이렇게 생각해보자. 고인돌과 같은 분묘양식은 청동기시대에도 쉽게 변하지 않지만, 생활문화인 토기와 같은 양식은 석기시대를 지나 청동기시대로 접어들면서, 문화 단절을 이룬다면, 북해를 돌아 이베리아반도를 거쳐, 흑해까지 진출한 고인돌 인류에게는 환북극권 빗살무늬토기문화는 문화전파 경로를 따라 자연스럽게 사라질 수가 있으며, 새로운 토기(유럽형 채색토기 또는 도기)로 양상이 바뀔 수도 있다.
그럼 지중해 고인돌 문화의 주인공 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였던가? 과감히 추정을 해보자. 지난 장에서 크로마뇽인의 후손이 아닐까하고 필자가 추정한 그리스 시대 ‘청동기문화’의 고대 이베리아인에 대한 기록을 다시 검토해 보았다. 이들은 스페인의 ‘에브로강’, ‘우엘바강’ 및 ‘연안지역’인 알메리아에 살았다. 아무래도 ‘북유럽’에서 지중해를 거쳐 흑해 연안지역에까지 고인돌을 축조한 이들은 페니키아, 로마 문자를 인용해 도무지 알 수 없는 언어의 비문을 남긴 걸로 보아 이들이 유럽 거석문화의 신석기시대 그리고 그리스시대의 유럽의 이베리안 청동기문화를 연 것 같다. 이들은 불과 3,000년 전(BC 8-6세기) 유럽으로 이주를 시작한 인도-유러피안 어족인 켈트어족과 혼혈족을 형성하기도 한다. 필자의 가설이 맞는다면, 에스키모어와 고대 이베리아어의 유사성을 검토해볼 만하다. 문화인류사학자들에게 제안을 한다면, 페니키아문자로 쓰인 그 이베리아 언어를 현대의 에스키모어로 유추해 번역을 시도해 보면, 스톤-헨지 등의 미스터리와 관련된 감추어진 문명의 이야기를 만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크로마뇽인은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정말 알타미라 동굴에서 크로마뇽인 유골이 발견되었을까? 인터넷검색을 해보니 ‘발견 후기’가 나와 있고 분명 ‘유골 대신 동물뼈’만 발견되었다고 한다. 단지 유골발굴지역이 멀지 않다는 이유로 라스코, 알타미라 동굴벽화의 주인공이 왜곡된 것이다. 최근 발간된 ‘선사예술기행’의 저자(요코하마 유지)에 의하면 1만3천년에서 1만 년 전 사이의 우르티아가동굴에서 크로마뇽인과 바스크인의 특징을 모두 가진 두개골이 발견되었다고 하니 아마도 현재의 스페인, 프랑스 국경지역의 바스크어족에 그들의 유전자를 남긴 듯하다. 그런데 이 저자는 바스크어가 동사가 뒤에 오는 ‘알타이어’라고 하였다.

그림 5-6 알타미라의 동굴벽화
‘알타이어’라고?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하지만, 아무튼 유럽의 선사시대는 인도-유러피안 문화와 관계없는 것은 확실하다. 그럼 어떻게 해서 알타이어가 거기까지 존재할 수 있을까? 바스크어는 딱히 친족관계를 알 수 없는 고립어지만, 그동안 고립어로 평가되어온 한국어, 일본어처럼 혼혈이 심하게 일어난 지역이거나 말 그대로 빙하 등의 이유로 문화 고립이 일어날 경우 친족관계를 쉽게 확인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바스크어가 바로 크로마뇽인어(혹은 이베리안어)와 알타이어의 혼혈화의 결과일 수가 있다.
대분류에 속하는 인도-유러피안어족, 함-셈어족, 티벳-중국어족은 각각 문법 뿐 아니라, 단어의 유사성으로도 각 언어 대그룹 내의 친족관계를 쉽게 확인가능하다. 그러나 우랄-알타이어는 문법적 특징이외는 단어, 발음의 특징이 지역에 따라 너무나 차이가 많다. 이것은 왜 그럴까? 바로 ‘생활양식’의 차이 때문이다. 수렵을 주생활로 하는 인류에게는 동물의 이동경로를 쫒아 광범위하게 이주한다. 그러나 채집을 주로 하던 인류에게는 그렇게 이동경로가 광범위하게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언어의 연관성이 강한 인도-유러피안어족, 함-셈어족, 그리고 티벳-중국어족은 수렵이 아니라 ‘채집’생활을 주로 하던 인류인 것이다. 이로부터 자연스럽게 유목문화와 농경문화의 분리가 일어난다고 보아야 하지 않는가?
이제 알타미라의 동굴벽화의 진실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M242로 대표되는 우랄-알타이어족(?)의 조상이 되는 인류가 무려 15,000여 년 전에 베링해를 건너 캐나다의 두터운 빙하를 뚫고 남미까지 간다면, 너무나 가까운 유럽지방에 진출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우랄어족이 LL2YYG, 그리고 한국인에게도 발견되는 Z type mtDNA의 새로운 경로를 가지고 있음은 지난 장에서 밝힌 바 있다.
5-2. 구석기시대 비너스

그림 5-7 빌렌도르프의 비너스(左)와 바이칼호 주변의 Mal'ta에서 발견된 비너스(右, 23,000년전, 맘모스 상아 재질 출처: 위키사전)
이제 수렵생활의 동굴벽화보다 탄소연대가 더 오래된 2~3만 년 전의 신비로운 오스트리아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유적의 진실을 밝혀보자. 이 구석기시대의 비너스는 유럽에서 매우 떨어진 ‘바이칼호 주변’에서도 같은 유형이 발견된 바 있어 학계를 놀라게 한 적이 있다. 뿐만 아니라 시베리아 곳곳에 동일한 유형의 비너스 입상이 광범위하게 발견되었다. 재질은 돌이 아니라 매머드의 상아로 추정되는 동물의 뼈다귀로 만들어진 것으로 재질 자체가 어로라기보다는 수렵생활의 특징을 반영한다.

그림 5-8 인류의 이동지도 (출처 : 한겨레)
필자가 Y 염색체 인류이동지도인 윗 그림(그림 5-8)을 보았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은 한단고기와 마찬가지로 역시 재야사학가들이 주로 참조하는 신라시대 내물마립간시기의 박제상이 지은 ‘부도지’라는 책의 내용이었다. 태초에 마고할머니가 선천을 남자로 후천을 여자로 하여, 궁희와 소희를 낳고, 궁희와 소희도 같은 방법으로 각기 황궁, 청궁, 백소, 흑소씨를 낳았다는 것이다. 마치 그림의 분기별로 나누어진 인종별 피부색과 이동경로가 몹시도 유사하다.
즉 황궁(M242?, 알타이어족. 현재로서는 아직 미 분류 임시명을 가진 LL2YYG가 더 정확함), 청궁(M175, 티벳-중국어족), 백소(M173, 인도-유러피안), 흑소(M20, 드라비다어족)를 낳은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삼신할머니들은 선천을 남자로 후천을 여자로 하여 무성 생식하였다고 하는데 이 말 그대로로는 이해가 안 될 것이다. 다만 선천을 인류 집단으로 표시하면 4집단의 모태가 되는 M9인류가 되는 듯하고, 후천을 백소와 황궁의 모태인 M45라고 하면 대충 맞아 떨어질 것 같다.
물론 새로운 인류 이동지도에 의하면 이런 식의 족보 구분은 무의미해질 정도로 매우 복잡해졌지만 대략의 경향성은 맞지 않은가? 여기에 구약성서의 노아의 방주이야기까지 접목하면 완전히 하나의 스토리가 이루어진다. 즉 노아의 아들은 3명인데, 나이순으로 각기 셈, 함, 야벳이다. 그림 상으로 나이를 인류집단으로 분류하면, 셈은 M89, 함은 M9, 야벳은 M45라고 하면 이 역시 부도지와 똑같이 반쪽의 이야기지만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진다.
노아는 자신이 포도주를 먹고 벌거벗고 자는 것을 보고 차남 ‘함’이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였다하여, 노아의 부끄러움을 가려준 형 후손의 노예가 될 거라고 저주를 하였다한다. 이 이야기 때문인지, 실제로 이집트인, 유태인을 포함하는 지중해 남부 백인종들을 ‘함어족’이라 하고, 중동의 아라비아인들을 이름 그대로 ‘셈어족’이라 하며 합쳐서 ‘함셈어족’이라 부른다. 그리고 야벳은 나머지 인도-유러피안이 되므로 적어도 백인종들의 3가지 족보가 다 마련되는 셈이다.
부도지에서는 금단의 열매인 포도를 먹는 사람이 노아가 아니라, 백소족의 ‘지소’라는 사람이다. 지소는 포도를 먹은 후 색상을 구분할 수 있게 되어 눈이 밝아졌음을 찬양하지만, 마고의 분노로 ‘지유(地乳, 땅에서 흐르는 젖)’가 흐르지 않자, 그는 크게 부끄러워 가장 먼저 마고성을 떠나는데, 후에 남은 백소, 청궁, 황궁, 흑소씨는 각기 4 방향으로 이주를 하며 복본을 맹세한다. 먼저 떠난 지소족은 나중에 떠난 이들을 공격하는 등 부도의 본성을 잃는다. 그 후 마고는 성문을 굳게 닫고 궁희, 소희의 2딸과 함께 마고성을 청소해서 그 물이 서쪽과 동쪽으로 넘쳐 백소 및 청궁족의 많은 사람이 죽었다 한다. 대략 이런 스토리이다.
이 신화들(노아의 방주와 부도지)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류가 공통으로 기억하는 홍수설화가 최초의 인류분기를 설명하는데 도움을 주었듯이, 설화자체가 어떤 역사적 사실을 구전으로 전승하고, 후세에게 어떤 종교적 교훈을 남기는 수단이 된다면 상당히 유용한 정보도 얻을 수가 있을 것이다.
노아의 방주와 부도지를 엮어보니, ‘지소’는 가장 먼저 떨어져 나간 중동지방과 북부아프리카로 번져나간 ‘함셈어’족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함셈어족과 인도-유러피안어족(야벳족? 즉 백소족)은 터키-이라크-이란으로 이어지는 서부 고원의 남(지소)과 북(백소)으로 각기 퍼져 나가 별도의 농경 문명들을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드라비다어족(흑소족)은 남쪽(인도)으로, 티벳-중국어족(청궁족)은 동쪽(중국)으로 그리고 우랄-알타이어족인 황궁족 만이 천산산맥을 넘어 북으로 다시 알타이산맥의 동서로 이주하여 '수렵문명'을 구축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럼 이들이 나눠진 이 시기를 언제쯤으로 보아야 할까?
필자의 관념은 지금까지 상대적으로 M130 어로인류의 이동을 강조하다 보니, 너무나 오랫동안 이들 고산지방 출신인류를 이란-티벳 고원에 묶어 놓았다. 삼신할미(마고, 궁희, 소희씨)의 의미는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채집생활에서 오는 ‘모계사회’를 의미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바로 이들의 거처였던 ‘산(山)’이다.
이 고산지방 채집생활의 모계사회의 전통이 인류의 오래된 ‘비너스’신앙을 낳은 것으로 보인다. 아시다시피 여자와 남자의 최초의 역할분담은 신체적 완력이 아니라 이동의 부자유스러움을 주는 ‘생식적 기능’의 차이로 발생하는 모계사회설이 있다. 생산력이 높은 여성의 채집생활이 생산력이 낮은 남성들의 사냥보다 우월하였기 때문에, 밥줄을 쥔 여성에게 권력이 있게 되었다는 것이 모계사회설이다.
그러나 모든 인류가 개별 가족노동을 기준으로 모계사회전통을 가졌다는 선입관에서는 벗어나자. 인류가 기본적으로 사회적 인간이라면 수렵(또는 어로)과 채집이라는 전체 집단의 생산 양식의 차이가 각 집단 내부에서의 개별 노동의 상대적인 생산력의 차이를 가져와, 인류 집단 자체가 남성 중심이냐 여성 중심이냐를 나눈다. 즉 채집이 주요한 생존수단인 사회는 모계사회로, 수렵 또는 어로가 주요한 생존수단인 사회는 부계사회가 될 것이다. 농경위주의 중국인과 어로위주의 일본인 사이의 가정 내 여권의 정도를 비교해보라. 아는 사람은 느낄 것이다.
그렇다면, 수렵민(알타이어족)의 관점에서 저술된 부도지의 마고신앙은 어떻게 된 것인가? 이집트의 이시스신화, 그리스-로마의 데르메르신화, 바빌로니아의 이쉬타르신화, 그리고 시리아 및 가나안의 아스다로테(아스다롯)신화 그리고 수메르의 이난나신화는 공통점이 있다. (이 모든 여신 신화는 계속적으로 모방 및 변형을 한 것으로 시간 순으로 본다면 이난나신화가 기본 원형이다.) 그것은 겨울철 남편(혹은 아들, 딸)을 찾아 지옥에 갔다가 다시 봄에 환생하는 ‘초본 식물’ 즉, ‘농경 생활’의 개념이 흐르는 ‘다산’과 ‘풍요’의 플롯이다.
반면, 수렵생활의 구석기시대의 비너스(마고)의 경우에는 엉덩이와 유방이 유독 강조된 ‘인류 집단 그 자체의 다산’의 의미에서 비롯되는 ‘조상 숭배’에 대한 전통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어디까지나 부도지나 한단고기는 황궁, 유인, 환인 등 수렵생활의 경험이 많은 ‘남성 원로’를 기준으로 서술되었다. 다만 두려움의 연속선에서 살아야 할 수렵민에게 있어서 마음의 안정을 주는 종교적 의미의 마고여신에 대한 조상숭배의 전통이 시베리아에서 널리 발견되는 구석기시대의 비너스상(Venus figurine)의 의미가 아닐까한다.
5-3. 인류분기와 수렵생활 인류

그림 5-9 뷔름빙기(8만 년 전~1만 년 전)를 전후한 기후변동그래프
이제 ‘산’이야기를 하자. 기후변동 그래프를 다시 보면, 6~3만 년 전에 뷔름빙기 안에서 소간빙기가 있었다. 그리고 2만 년 전에 대 빙하기가 있고, 1만 년 전부터 지금까지는 계속 더워진 간빙기를 형성하는 것이다. 대빙하기라고? 그렇다. 빙하기가 오기 시작하면, 산꼭대기는 하얗게 눈이 쌓이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시냇물(=지유)은 마르게 된다. 마치 어머니가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되어, 더 이상 젖이 안 나오는 경우처럼……. 필자는 이것이 마고 ‘할미’의 의미라고 본다. 지구에서 제일 높은 산인 에베레스트는 산 높이를 측정한 영국인의 이름에서 따왔으나, 티베트인의 언어로는 초모랑마(Chomorangma), 즉 ‘세계의 어머니’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2만 년 전의 대빙하기 후에 1만 년 전을 지나 계속 더워진 현재의 간빙기는 지난 번 추정처럼 엄청난 ‘홍수’를 부도지 설화처럼 동-서로 일으킬 수 있다. 이 홍수의 흔적이 엄청나, 카스피해, 흑해, 지중해가 꼭 그런 흔적을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젖이 마르고 산이 할머니가 되는 빙하기가 오는 시기는 지소에 분노한 마고가 마고성을 굳게 닫는 시점으로 생각되며, 마고 설화에서 복본을 맹세하고 4인류가 떠난 시점(3만~2만 년 전)과 마고성을 청소하여 백소와 청궁족이 큰 희생을 치룬 대 홍수가 일어난 시기인 1만 년 전까지, 전체적으로 2만 년의 빙하기 기간을 압축된 설화로 표현한 시기를 말하는 듯하다.

그림 5-10. 2만 년 전의 대빙하기 (출처: 내셔날 지노그래픽)
따라서 이들 인류의 분기시점은 대빙하기 전의 서서히 추워지기 시작하는 즉, 마고의 젖이 마르는 약 3만 년 전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실제로 이들 인류의 유전자변이가 모두 이 시점에 일어나는 것으로 보아 그러한 추측이 맞을 것이다. LL2YYG의 연도 추정이 아직 미정이지만 M9에서 바로 분기되는 것으로 미루어 대략 3만 년 전이 될 것이다.
M242(M3) 및 LL2YYG를 표현하는 이들 수렵인류(황궁)는 3만 년 전에서 1만 년 전에 이르는 대빙하기를 포함하는 긴 시간을 시베리아를 좌우로 횡단하고, 남북 아메리카를 상하로 휘저으면서 매머드를 포함한 거대 포유동물을 멸종시킨 사냥의 귀재들로 살았을 것이다. 시베리아를 횡단하며 발견되는 구석기시대의 비너스 탄소연대측정 기록이 3만~2만 년 전이라는 것도 필자의 연도 추정을 반증한다.
이들 수렵인 들은 몹시 추워진 빙하기에 어떻게 이렇게 대륙을 종횡으로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을까? 최고의 빙하가 덮친 2만 년 전에는 북유럽 구석기시대 유적에서 썰매가 발견되었다고 하며, 필자가 읽은 한국일보기사에 의하면, 개의 기원이 1만5천 년 전 시베리아산 늑대라고 하는데, 적어도 극도로 추웠던 2만 년 전 최초의 수렵용 사육의 시작으로 시베리아에서부터 처음으로 개를 길들인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니 개썰매는 구석기시대에도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빙하가 후퇴한 1만 년 전에서 정착농경이 시작되는 6-5천 년 전까지, 그리고 그 후에도 일정 시기까지 이들을 대표하는 용어가 있었다. 그것은 스텝지역을 내달리던 ‘기마 민족’이라는 말이었다. 이후 역사시대에도 끊임없이 ‘농경민족’의 터전을 괴롭히던 유목민 문화의 뿌리는 여기서 시작되는 것이다.
수메르인들이 처음 나타날 당시로서는 너무나 높은 ‘문명’수준에 주변 민족이 모두 야만족이 되어버렸다. 이것을 심지어 우주인이 만든 문명이라는 말도 하는 책이 나왔다. 수메르인이 우리와 같은 교착어(단어의 뒤에 조사나 접사를 사용하는 언어이며 실제로 수메르어는 교착어임)를 사용하는 우랄-알타이어족이라면, 이러한 문화격차는 어렵지 않게 추정이 가능하다.
적어도 문명이 발전하려면 ‘고생’이라는 요소가 필수적이다. 처음 5~6만 년 전 대책 없이 바다로 떠밀린 이들이 ‘배’를 발명하고, ‘거석문명’을 창조하였지만, 빙하기를 이길 수 있는 풍부한 해산물의 안락함에 빠져 발전을 하지 못하고 결국 주변 육지의 민족에게 피정복화, 동화의 길을 가게 되었다.
남들은 비교적 따뜻하고 안락한 곳에서 채집-농경을 할 때, 북풍이 몰아치는 매서운 눈보라를 이기고 생존해야할 ‘필요’가 차원이 다른 ‘기술발전’을 낳게 된 셈이다. 어떻게 보면 가장 원시적 생활을 하고 뒤늦게 문명이 싹튼 유럽이 오늘날 세계를 주름잡지 않는가? 그러나 수메르인들은 결국 주변인과 구분되는 높은 담과 성을 쌓은 덕분에, 주변의 소위 ‘야만족’에게 후손도 못 남기고 멸망당하고 말았다. 주변인과 몸소 결혼정책을 실시하여 덕(德)으로 감화시키고 만주와 한반도에 대통일 문명을 창조한 고조선문명과 여러모로 비교된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유목생활의 인도-유러피안어족인 스키타이족(유럽동부 서시베리아평원지역의 러시아, 또는 카자흐스탄지방에 거주), 말이 끄는 전차를 사용한 앗시리아인(셈어족)인데, 이들과 수렵생활의 우랄-알타이어족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원시 한반도의 밀, 보리농사로 미루어 분명 스텝을 가로지르는 문명 간의 교류가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즉 한반도의 신석기인 주거지에서 오곡이 발견된 것을 상기해보자. 소로리 볍씨를 제외하고 최고 탄화미로도 알려진 BC 2,300년 유적지라면 오곡이 발견된 주거지가 사실은 고조선 초기의 청동기 시대 주거지로 생각된다. 보리는 동시기 중국 황하유적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내륙의 서북쪽 지역에서만 발견되며 페르시아가 기원인 겨울 작물이기 때문에, 북방전래루트를 확인시켜 관계자를 경악시켰다고 필자가 읽은 한 신문기사는 전한다.
그러나 솔직히 의문스럽다. 신라와도 관련된 황금문명의 스키타이인들이 문자를 남기지 않았는데 백과사전은 어떻게 이들을 인도-유러피안이라고 분류하였을까? 스키타이인의 그림, 조각, 풍속 등 백인의 외모로 미루어 ‘이란계’라 본 듯하다. 그런데 이해하기가 힘들다. 이들은 알타이산에서 금을 채취한 기마민족이다. 우랄어를 사용하는 백인계통의 핀, 사미족과 관련성이 없을까?
또한 이란어는 인도-유러피안어지만 주어-목적어-동사의 어순을 취하고 인도의 힌디어도 마찬가지다. 북유럽-흑해-이란-인도의 대각선으로 이어지는 문화 교류의 접선이 존재한다. 최근 스키타이와 흉노(훈족)의 연관성, 그리고 흉노와 신라왕통인 김알지계의 연관성을 주장하는 글 들이 있다.
하지만 말을 타지는 않았지만 전차를 끄는 용도로 사용한, 확실한 셈족 백인계의 앗시리아로 볼 때는 그 대각선을 넘는 고대의 문명의 교류가 있던 것은 사실이다. 이들은 전차를 사용하여 한 때 중동지역의 패자가 되었다. 개의 기원이 시베리아산 늑대라고 하지만 모든 문명권에서 개를 사육하였음이 각종 고대 유적에서도 발견되는 것도 고대 세계의 문명 교류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추정이다.
이 고대의 문명교류의 접선은 역사시대 이후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 그리고 당나라 이후 현재의 비단길을 횡단한 돌궐(투르크)루트하고는 또 다르다. 문화인류사학자들은 알렉산더의 헬레니즘 문명의 영향을 신라의 석굴암 불상까지 관련시킨다. 또한 투르크인의 기나긴 서방원정은 한때 몽고의 지배도 받았지만, 현재의 ‘~스탄’이라는 국가들을 경유하여, 북아프리카를 지나 이베리아 반도(스페인)까지 그 영향력을 확대시켰다. 투르크메니스탄과 터키의 언어는 알타이어이나 함셈어족과의 혼혈로 서쪽으로 갈수록 백인화 되었다. (손님의 거처에 부인을 묵게 하는 투르크 유목민의 혼혈지향풍속은 마르크폴로의 동방견문록에도 소개되어 있는데, 드넓은 지역 환경에 드문 인구밀도에서 근친교배의 위험성을 막고 잡종강세를 유지하기위한 생물학적 해석도 가능하다.)
그러나 스키타이로 볼 때는 문명의 교류가 아닐 수도 있다. 스키타이인이 현재의 핀란드 거주 우랄어족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또 다른 증거가 있다. 그것은 핀란드에서 유래된 것으로 유명한 ‘사우나’가 스키타이인의 유적지에서 발굴된 일이다. 핀란드의 역사에서 핀족은 기원을 전후하여 이 지역에 이주한 것으로만 나와 있을 뿐이다. 그 이전의 핀족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며 스키타이는 BC 8-7세기에서 BC 4-2세기 사이에 존재하였으며, 그 이후는 역시 이란계통으로 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유목민인 사르마티아인에 흡수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르마티아인 역시 기원 후 4세기 이후 훈족의 침입으로 게르만-슬라브족에 흡수되어 사라진 민족으로, 이들이 정말 ‘이란 계통’인지 의문이다. 기록상으로는 그리스의 헤르도투스가 처음 ‘사우나’를 언급하였으며 그는 중앙유라시아의 시티아 주민이 그러한 풍속을 가졌다는데, 그 곳이 바로 스키타이인이나 사르마티아인이 살던 곳과 동일 지역이다.
한편 북미에 야생마가 존재하지만, 중남미 인디오(M242의 아류인 M3) 들은 고산지방에서 화전 농사를 지었을망정, 말을 이용하지 않았다. 또한 이들이 사용하는 아메린드어가 우랄-알타이어계라는 증거도 없다. 그것은 베링해로 구분된 문화단절에 따라 상호간의 언어와 역사가 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잉카, 마야, 아즈텍 문명을 창조한 인류들은 그들의 이동 경로(시베리아와 캐나다 북부의 빙하를 뚫고 이동)를 볼 때는 수렵을 주생활로 하였다고 볼 수밖에 없겠지만, 그들의 출발지였던 티벳 고원의 전통을 따라 멀리 떨어진 안데스의 고산지방에서 타민족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농경문화를 이룩했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황궁으로 볼 수밖에 없는 유전자 이동 지도 상, 이들이 생활상으로나마 마고복본을 정말로 구현하였던 것일까?)
그런데……, 높은 수준의 고산문명과 다른 아마존 강의 원시적인 인디오는? 그것은 잘 모르겠다. 유전자 지도 상으로는 고산문명의 인디오와 아마존의 인디오가 구분이 되지 않는다. (문명이란 무엇인가? 멸망한 고도 문명의 계급사회와 현대 문명사회에서도 여전히 전통적 삶을 유지하고 있는 원시적 공산사회……. 그들은 각자 최선의 삶을 선택했을 뿐일 것이다.)
최근 브라질 상파울로 대학의 Walter Neves교수는 아마존에 사는 인디오들이 베링해를 건넌 아시아인(M242)보다는 유전적으로 오스트레일리아나 심지어 아프리카의 인종과 가깝다는 설을 제시하였는데, 필자도 그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남미 아마존 강의 원주민이 어로를 주생활로 하고 있다면, M130 유전자를 가진 인류가 호주에서부터 카누를 타고 남태평양제도를 거쳐 건너 왔을 가능성을 생각해야한다.

그림 5-11. 티벳불교도들이 수미산으로 여기는 신산(神山)인 피라미드를 닮은 카일라스산 주봉 캉린보체.
아무튼 산(山)의 한자어는 이렇게 삼신의 모습을 형상화한다. 인류의 산에 대한 기억은 신기하게도 극과 극에서 서로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마고를 의미하는 중남미와 이집트의 피라미드라는 생각이 든다. 최근 티베트에서 히말리야 산맥의 카일라스산 인근에 피라미드가 발견되었다는 러시아 발굴학자와 산을 착각한 것이라는 중국인 학자 사이의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이 산이던 피라미드이던, 매우 오래전부터 그 지방에서 출발한 고산지방출신 인류들의 산을 숭배하는 공통된 (마고)신앙이 양극단의 피라미드 문화의 원형이 아닐까한다.
또한 최근에 중국 서안 일대에서 ‘피라미드’가 발견되었다는 이야기가 네티즌사이에서 나돈다. 중국 당국은 주나라문명이라고 하지만 이 피라미드는 얼핏 보기에도 고구려의 장군총을 닮은 모습이라 네티즌은 전설적인 환국문명이라 주장한다. 사실이야 어떻든 우랄-알타이문화의 12연방의 환인제국이 동서로 2만리(시베리아), 남북으로 5만리(남북아메리카?)라는 이야기가, 시베리아 수렵민의 광범위한 이동을 고려한다면 황당한 이야기라고 필자는 보지 않으며, 중국의 내륙에 피라미드를 건설 못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역으로 중국인(청궁) 역시 고산지방출신으로 피라미드(마고대성)의 기억(서왕모?)을 공유하지 못할 이유도 없고, 대규모 인력동원이 이루어져야 건설이 가능한 피라미드가 집약적 농경사회를 전제로 한다면 중국문명일 가능성도 전혀 없지는 않다.
이 글은 자연과학분야의 전문가이면서 '샤카스바비큐'의 어드바이저인 이영득 박사의 개인블로그에서 옮겨 저장한 글입니다.
바비큐는 인류학에서 생존과 진화에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연구자료로 활용하고자 이 곳에 자료를 옮겨 놓습니다.
기존의 일반화된 견해와 다른 부분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런 면에서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느끼는 샤카의 의도와 일치하므로 연구자료로 활용 계획임.
5-1. 이베리아인과 고인돌
“서유럽 최초의 인류인 크로마뇽인은 최후의 마지막 빙기(2만 년-1만 년 전)에 숫자가 줄어들어 따뜻한 기후의 스페인, 이탈리아, 발칸반도 지역으로 물러났다가 빙하기가 후퇴하자 북쪽과 서쪽으로 이주, 오늘날 서유럽인의 최대 유전자 마커(M343-3만5천 년 전에 발생)를 형성하였다.”
이 이야기는 스펜서교수의 유전자프로젝트가 진행 중인 내셔날 지노그래픽 사이트의 설명이다. 또한 미토콘드리아 유전자 증거를 처음 소개하여 베스트셀러가 된 ‘이브의 일곱 딸들’의 저자(브라이언 사이키스)도 “현대 유럽인의 80%는 4~5만 년 전에 유럽에 살기 시작한 수렵인(크로마뇽인)의 후손이라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유럽인의 대다수가 불과 1만 년 전에 근동지방으로부터 이주해온 농경인 들의 후손이라는 기존의 학설을 뒤집었다.”고 한다.
그림 5-1 M343 이주그림 및 연도표시 (출처: 내셔날 지노그래픽)
M343 마커는 윗 그림처럼 인도-유러피안어족인 M173에서 분기한 새로운 아형의 이름으로 게르만족을 일컫는다. 이들은 무려 4만 년 전에 다른 민족 들이 한 곳에 오래 머문 채 이동하기도 전에 일찍이 시베리아 평원을 거쳐 이베리아반도까지 진출했다가 다시 유럽지역으로 퍼져 살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전자 이동지도 상으로 이 게르만족은 시베리아 및 아메리카대륙으로 이주한 M242마커의 공동조상인 M45에서 분기한다. M45를 찾아보았다. M45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의 중앙아시아인의 사진(돌궐, 흉노의 후예, 우랄-알타이어족)이 나왔다. 그리고 M242는 시베리아 에스키모들의 사진이 나와 있고 그 분기는 겨우 2만 년 전이다.
그러니까 이 그림 상으로 보면, 4만 년 전 유럽에 출현하여 인도-유러피안어를 사용하는 크로마뇽인의 조상은 중앙아시아의 알타이어족 투르크계 유목민의 후손이었던 셈이다. 참으로 대단하다. 이 영국의 유전학자들이 박박 우기면, 기록으로 명백히 남아있는 인류 역사도 막 바뀌어 버리는구나. 그럼 겨우 기원 후 4세기(1,600년 전)에 훈족의 침략을 받아 대거 이주한 게르만-슬라브족 대이동의 역사가 무려 4만 년 전(네안데르탈인도 살고 있던 때이다)에 일어난 역사였던가? 고선지 장군이 토벌했던 돌궐족(투르크인)이 중앙아시아로 몰려가서 무려 4만 년 전의 유럽 크로마뇽인의 조상이 되었던가? 그리고 그 돌궐족에서 에스키모가 나타나 1만5천 년 전에 얼어붙은 베링해를 건너 중남미 인디오의 조상이 되었는가? 더욱이 그림 5-1은 M173에서 같이 분기하여야할 M17 돌연변이형(슬라브 및 이란, 인도 아리안족)은 표시도 되어 있지 않다. 빙하기 후퇴 후에 다시 북유럽으로 가서 M343 돌연변이형을 일단 취소하고 M173에서 다시 M343과 M17의 두 개로 나뉘는가?
필자 지금까지의 논리 전개를 유전자 정보에 상당부분 의존해왔다. 그러나 이 지독한 유럽인 과학자들의 ‘서구 중심주의’에는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다. 유럽형 단일민족주의자를 보는 듯하다. 그렇게도 크로마뇽인의 후손이 되고 싶은가보다. 크로마뇽인이 식인습관이 있었던 걸 알까나?
필자는 이 경우에도 카오스이론의 적용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혼혈이 일어날 경우, 극히 적은 확률의 크로마뇽인의 mtDNA가 이후 이주민의 전체 mtDNA를 바꿀 가능성을 (실험을 제대로 했는지 모르지만) 브라이언 사이키스 박사는 고려하고 있었어야 한다. 2장에서 설명한 바 있는 해안가 mtDNA를 유럽지역에서 발견하였다면(‘이브의 입곱딸들’이란 책의 제목은 mtDNA분석에 기초함을 의미한다), 머콜리 박사의 설명처럼 호주로 간 오스트로네시아 어족 중에서 4만 년 전 시나이반도를 통하여 유럽지방으로 다시 올라간 크로마뇽인들과 훨씬 후에 이주한 현재의 M343 Y염색체 돌연변이형 인류인 게르만족의 혼혈이 일어났을 가능성만 언급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필자 역시 크로마뇽인에 대해서 생각하다 머리에 쥐가 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고인돌 때문이다. 크로마뇽인은 4~1만 년 전의 범위에 유럽에 존재하였다. 크로마뇽인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은 동굴생활을 하였고, 남아 있는 동굴벽화로 추정컨대, 어로라기보다는 명백히 수렵에 의존한 원시인들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주구장장 논증했듯이 어떤 인류든 자신의 ‘주 식생활 문화 습관’을 바꾸기는 그리 쉽지 않다. 그럼 유럽, 영국, 지중해, 그리고 북아프리카 등지 뿐 아니라 흑해 연안까지 분포하는, 분포로 미루어 ‘어로 생활’을 반영하는 해안가, 강변의 고인돌, 환상열석 등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림 5-2 고인돌분포도 (출처: 변광현, 원시예술)
그림 5-3 러시아 카프카즈-흑해연안-의 고인돌 (출처: 변광현, 원시예술)
그림 5-4 미국의 고인돌 (뉴욕, 인터넷 검색)
남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에도 ‘오스트로네시아어족’과 고인돌이 있다. 그림 5-4에서 보듯이 고인돌이 북아메리카 뉴욕근처에서도 발견되었다. 이건 이해하겠는데 유럽과 지중해 지방은 참으로 미스터리다. 아무리 생각해도 빗살무늬토기의 경우처럼 한반도의 고인돌 축조 인류가 북해를 돌아 참으로 멀리도 이주했다는 생각만 든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매우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배가 있었다. 이동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다만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되는 시베리아 북부 타이가지역에서는 고인돌이 발견되지 않는 것이 미스터리다. 정말 없는 것일까?
아니다. 한반도 고인돌의 ‘기존 북방유래설’을 입증하는 근거로 제시되는 시베리아 카라스크 돌널무덤(BC 1,300년 유적,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되는 북해로 흐르는 예니세이강 유역)이 사실은 거꾸로 한반도로부터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이 돌널무덤 양식도 고인돌과 함께, 한반도 및 만주에서 널리 발견된다. 그러니까, 한반도의 고인돌 축조문화 인류도 지역, 시대에 따라 가지 가지 양식을 가졌던 셈이다.
그림 5-5 한반도에서 발굴된 돌널무덤
그럼……. 북위 55°이상의 유럽 북부가 아니라 남부 및 지중해 지방에서도 발견되어야할 빗살무늬토기는? 이렇게 생각해보자. 고인돌과 같은 분묘양식은 청동기시대에도 쉽게 변하지 않지만, 생활문화인 토기와 같은 양식은 석기시대를 지나 청동기시대로 접어들면서, 문화 단절을 이룬다면, 북해를 돌아 이베리아반도를 거쳐, 흑해까지 진출한 고인돌 인류에게는 환북극권 빗살무늬토기문화는 문화전파 경로를 따라 자연스럽게 사라질 수가 있으며, 새로운 토기(유럽형 채색토기 또는 도기)로 양상이 바뀔 수도 있다.
그럼 지중해 고인돌 문화의 주인공 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였던가? 과감히 추정을 해보자. 지난 장에서 크로마뇽인의 후손이 아닐까하고 필자가 추정한 그리스 시대 ‘청동기문화’의 고대 이베리아인에 대한 기록을 다시 검토해 보았다. 이들은 스페인의 ‘에브로강’, ‘우엘바강’ 및 ‘연안지역’인 알메리아에 살았다. 아무래도 ‘북유럽’에서 지중해를 거쳐 흑해 연안지역에까지 고인돌을 축조한 이들은 페니키아, 로마 문자를 인용해 도무지 알 수 없는 언어의 비문을 남긴 걸로 보아 이들이 유럽 거석문화의 신석기시대 그리고 그리스시대의 유럽의 이베리안 청동기문화를 연 것 같다. 이들은 불과 3,000년 전(BC 8-6세기) 유럽으로 이주를 시작한 인도-유러피안 어족인 켈트어족과 혼혈족을 형성하기도 한다. 필자의 가설이 맞는다면, 에스키모어와 고대 이베리아어의 유사성을 검토해볼 만하다. 문화인류사학자들에게 제안을 한다면, 페니키아문자로 쓰인 그 이베리아 언어를 현대의 에스키모어로 유추해 번역을 시도해 보면, 스톤-헨지 등의 미스터리와 관련된 감추어진 문명의 이야기를 만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크로마뇽인은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정말 알타미라 동굴에서 크로마뇽인 유골이 발견되었을까? 인터넷검색을 해보니 ‘발견 후기’가 나와 있고 분명 ‘유골 대신 동물뼈’만 발견되었다고 한다. 단지 유골발굴지역이 멀지 않다는 이유로 라스코, 알타미라 동굴벽화의 주인공이 왜곡된 것이다. 최근 발간된 ‘선사예술기행’의 저자(요코하마 유지)에 의하면 1만3천년에서 1만 년 전 사이의 우르티아가동굴에서 크로마뇽인과 바스크인의 특징을 모두 가진 두개골이 발견되었다고 하니 아마도 현재의 스페인, 프랑스 국경지역의 바스크어족에 그들의 유전자를 남긴 듯하다. 그런데 이 저자는 바스크어가 동사가 뒤에 오는 ‘알타이어’라고 하였다.
그림 5-6 알타미라의 동굴벽화
‘알타이어’라고?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하지만, 아무튼 유럽의 선사시대는 인도-유러피안 문화와 관계없는 것은 확실하다. 그럼 어떻게 해서 알타이어가 거기까지 존재할 수 있을까? 바스크어는 딱히 친족관계를 알 수 없는 고립어지만, 그동안 고립어로 평가되어온 한국어, 일본어처럼 혼혈이 심하게 일어난 지역이거나 말 그대로 빙하 등의 이유로 문화 고립이 일어날 경우 친족관계를 쉽게 확인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바스크어가 바로 크로마뇽인어(혹은 이베리안어)와 알타이어의 혼혈화의 결과일 수가 있다.
대분류에 속하는 인도-유러피안어족, 함-셈어족, 티벳-중국어족은 각각 문법 뿐 아니라, 단어의 유사성으로도 각 언어 대그룹 내의 친족관계를 쉽게 확인가능하다. 그러나 우랄-알타이어는 문법적 특징이외는 단어, 발음의 특징이 지역에 따라 너무나 차이가 많다. 이것은 왜 그럴까? 바로 ‘생활양식’의 차이 때문이다. 수렵을 주생활로 하는 인류에게는 동물의 이동경로를 쫒아 광범위하게 이주한다. 그러나 채집을 주로 하던 인류에게는 그렇게 이동경로가 광범위하게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언어의 연관성이 강한 인도-유러피안어족, 함-셈어족, 그리고 티벳-중국어족은 수렵이 아니라 ‘채집’생활을 주로 하던 인류인 것이다. 이로부터 자연스럽게 유목문화와 농경문화의 분리가 일어난다고 보아야 하지 않는가?
이제 알타미라의 동굴벽화의 진실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M242로 대표되는 우랄-알타이어족(?)의 조상이 되는 인류가 무려 15,000여 년 전에 베링해를 건너 캐나다의 두터운 빙하를 뚫고 남미까지 간다면, 너무나 가까운 유럽지방에 진출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우랄어족이 LL2YYG, 그리고 한국인에게도 발견되는 Z type mtDNA의 새로운 경로를 가지고 있음은 지난 장에서 밝힌 바 있다.
5-2. 구석기시대 비너스
그림 5-7 빌렌도르프의 비너스(左)와 바이칼호 주변의 Mal'ta에서 발견된 비너스(右, 23,000년전, 맘모스 상아 재질 출처: 위키사전)
이제 수렵생활의 동굴벽화보다 탄소연대가 더 오래된 2~3만 년 전의 신비로운 오스트리아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유적의 진실을 밝혀보자. 이 구석기시대의 비너스는 유럽에서 매우 떨어진 ‘바이칼호 주변’에서도 같은 유형이 발견된 바 있어 학계를 놀라게 한 적이 있다. 뿐만 아니라 시베리아 곳곳에 동일한 유형의 비너스 입상이 광범위하게 발견되었다. 재질은 돌이 아니라 매머드의 상아로 추정되는 동물의 뼈다귀로 만들어진 것으로 재질 자체가 어로라기보다는 수렵생활의 특징을 반영한다.
그림 5-8 인류의 이동지도 (출처 : 한겨레)
필자가 Y 염색체 인류이동지도인 윗 그림(그림 5-8)을 보았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은 한단고기와 마찬가지로 역시 재야사학가들이 주로 참조하는 신라시대 내물마립간시기의 박제상이 지은 ‘부도지’라는 책의 내용이었다. 태초에 마고할머니가 선천을 남자로 후천을 여자로 하여, 궁희와 소희를 낳고, 궁희와 소희도 같은 방법으로 각기 황궁, 청궁, 백소, 흑소씨를 낳았다는 것이다. 마치 그림의 분기별로 나누어진 인종별 피부색과 이동경로가 몹시도 유사하다.
즉 황궁(M242?, 알타이어족. 현재로서는 아직 미 분류 임시명을 가진 LL2YYG가 더 정확함), 청궁(M175, 티벳-중국어족), 백소(M173, 인도-유러피안), 흑소(M20, 드라비다어족)를 낳은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삼신할머니들은 선천을 남자로 후천을 여자로 하여 무성 생식하였다고 하는데 이 말 그대로로는 이해가 안 될 것이다. 다만 선천을 인류 집단으로 표시하면 4집단의 모태가 되는 M9인류가 되는 듯하고, 후천을 백소와 황궁의 모태인 M45라고 하면 대충 맞아 떨어질 것 같다.
물론 새로운 인류 이동지도에 의하면 이런 식의 족보 구분은 무의미해질 정도로 매우 복잡해졌지만 대략의 경향성은 맞지 않은가? 여기에 구약성서의 노아의 방주이야기까지 접목하면 완전히 하나의 스토리가 이루어진다. 즉 노아의 아들은 3명인데, 나이순으로 각기 셈, 함, 야벳이다. 그림 상으로 나이를 인류집단으로 분류하면, 셈은 M89, 함은 M9, 야벳은 M45라고 하면 이 역시 부도지와 똑같이 반쪽의 이야기지만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진다.
노아는 자신이 포도주를 먹고 벌거벗고 자는 것을 보고 차남 ‘함’이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였다하여, 노아의 부끄러움을 가려준 형 후손의 노예가 될 거라고 저주를 하였다한다. 이 이야기 때문인지, 실제로 이집트인, 유태인을 포함하는 지중해 남부 백인종들을 ‘함어족’이라 하고, 중동의 아라비아인들을 이름 그대로 ‘셈어족’이라 하며 합쳐서 ‘함셈어족’이라 부른다. 그리고 야벳은 나머지 인도-유러피안이 되므로 적어도 백인종들의 3가지 족보가 다 마련되는 셈이다.
부도지에서는 금단의 열매인 포도를 먹는 사람이 노아가 아니라, 백소족의 ‘지소’라는 사람이다. 지소는 포도를 먹은 후 색상을 구분할 수 있게 되어 눈이 밝아졌음을 찬양하지만, 마고의 분노로 ‘지유(地乳, 땅에서 흐르는 젖)’가 흐르지 않자, 그는 크게 부끄러워 가장 먼저 마고성을 떠나는데, 후에 남은 백소, 청궁, 황궁, 흑소씨는 각기 4 방향으로 이주를 하며 복본을 맹세한다. 먼저 떠난 지소족은 나중에 떠난 이들을 공격하는 등 부도의 본성을 잃는다. 그 후 마고는 성문을 굳게 닫고 궁희, 소희의 2딸과 함께 마고성을 청소해서 그 물이 서쪽과 동쪽으로 넘쳐 백소 및 청궁족의 많은 사람이 죽었다 한다. 대략 이런 스토리이다.
이 신화들(노아의 방주와 부도지)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류가 공통으로 기억하는 홍수설화가 최초의 인류분기를 설명하는데 도움을 주었듯이, 설화자체가 어떤 역사적 사실을 구전으로 전승하고, 후세에게 어떤 종교적 교훈을 남기는 수단이 된다면 상당히 유용한 정보도 얻을 수가 있을 것이다.
노아의 방주와 부도지를 엮어보니, ‘지소’는 가장 먼저 떨어져 나간 중동지방과 북부아프리카로 번져나간 ‘함셈어’족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함셈어족과 인도-유러피안어족(야벳족? 즉 백소족)은 터키-이라크-이란으로 이어지는 서부 고원의 남(지소)과 북(백소)으로 각기 퍼져 나가 별도의 농경 문명들을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드라비다어족(흑소족)은 남쪽(인도)으로, 티벳-중국어족(청궁족)은 동쪽(중국)으로 그리고 우랄-알타이어족인 황궁족 만이 천산산맥을 넘어 북으로 다시 알타이산맥의 동서로 이주하여 '수렵문명'을 구축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럼 이들이 나눠진 이 시기를 언제쯤으로 보아야 할까?
필자의 관념은 지금까지 상대적으로 M130 어로인류의 이동을 강조하다 보니, 너무나 오랫동안 이들 고산지방 출신인류를 이란-티벳 고원에 묶어 놓았다. 삼신할미(마고, 궁희, 소희씨)의 의미는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채집생활에서 오는 ‘모계사회’를 의미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바로 이들의 거처였던 ‘산(山)’이다.
이 고산지방 채집생활의 모계사회의 전통이 인류의 오래된 ‘비너스’신앙을 낳은 것으로 보인다. 아시다시피 여자와 남자의 최초의 역할분담은 신체적 완력이 아니라 이동의 부자유스러움을 주는 ‘생식적 기능’의 차이로 발생하는 모계사회설이 있다. 생산력이 높은 여성의 채집생활이 생산력이 낮은 남성들의 사냥보다 우월하였기 때문에, 밥줄을 쥔 여성에게 권력이 있게 되었다는 것이 모계사회설이다.
그러나 모든 인류가 개별 가족노동을 기준으로 모계사회전통을 가졌다는 선입관에서는 벗어나자. 인류가 기본적으로 사회적 인간이라면 수렵(또는 어로)과 채집이라는 전체 집단의 생산 양식의 차이가 각 집단 내부에서의 개별 노동의 상대적인 생산력의 차이를 가져와, 인류 집단 자체가 남성 중심이냐 여성 중심이냐를 나눈다. 즉 채집이 주요한 생존수단인 사회는 모계사회로, 수렵 또는 어로가 주요한 생존수단인 사회는 부계사회가 될 것이다. 농경위주의 중국인과 어로위주의 일본인 사이의 가정 내 여권의 정도를 비교해보라. 아는 사람은 느낄 것이다.
그렇다면, 수렵민(알타이어족)의 관점에서 저술된 부도지의 마고신앙은 어떻게 된 것인가? 이집트의 이시스신화, 그리스-로마의 데르메르신화, 바빌로니아의 이쉬타르신화, 그리고 시리아 및 가나안의 아스다로테(아스다롯)신화 그리고 수메르의 이난나신화는 공통점이 있다. (이 모든 여신 신화는 계속적으로 모방 및 변형을 한 것으로 시간 순으로 본다면 이난나신화가 기본 원형이다.) 그것은 겨울철 남편(혹은 아들, 딸)을 찾아 지옥에 갔다가 다시 봄에 환생하는 ‘초본 식물’ 즉, ‘농경 생활’의 개념이 흐르는 ‘다산’과 ‘풍요’의 플롯이다.
반면, 수렵생활의 구석기시대의 비너스(마고)의 경우에는 엉덩이와 유방이 유독 강조된 ‘인류 집단 그 자체의 다산’의 의미에서 비롯되는 ‘조상 숭배’에 대한 전통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어디까지나 부도지나 한단고기는 황궁, 유인, 환인 등 수렵생활의 경험이 많은 ‘남성 원로’를 기준으로 서술되었다. 다만 두려움의 연속선에서 살아야 할 수렵민에게 있어서 마음의 안정을 주는 종교적 의미의 마고여신에 대한 조상숭배의 전통이 시베리아에서 널리 발견되는 구석기시대의 비너스상(Venus figurine)의 의미가 아닐까한다.
5-3. 인류분기와 수렵생활 인류
그림 5-9 뷔름빙기(8만 년 전~1만 년 전)를 전후한 기후변동그래프
이제 ‘산’이야기를 하자. 기후변동 그래프를 다시 보면, 6~3만 년 전에 뷔름빙기 안에서 소간빙기가 있었다. 그리고 2만 년 전에 대 빙하기가 있고, 1만 년 전부터 지금까지는 계속 더워진 간빙기를 형성하는 것이다. 대빙하기라고? 그렇다. 빙하기가 오기 시작하면, 산꼭대기는 하얗게 눈이 쌓이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시냇물(=지유)은 마르게 된다. 마치 어머니가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되어, 더 이상 젖이 안 나오는 경우처럼……. 필자는 이것이 마고 ‘할미’의 의미라고 본다. 지구에서 제일 높은 산인 에베레스트는 산 높이를 측정한 영국인의 이름에서 따왔으나, 티베트인의 언어로는 초모랑마(Chomorangma), 즉 ‘세계의 어머니’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2만 년 전의 대빙하기 후에 1만 년 전을 지나 계속 더워진 현재의 간빙기는 지난 번 추정처럼 엄청난 ‘홍수’를 부도지 설화처럼 동-서로 일으킬 수 있다. 이 홍수의 흔적이 엄청나, 카스피해, 흑해, 지중해가 꼭 그런 흔적을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젖이 마르고 산이 할머니가 되는 빙하기가 오는 시기는 지소에 분노한 마고가 마고성을 굳게 닫는 시점으로 생각되며, 마고 설화에서 복본을 맹세하고 4인류가 떠난 시점(3만~2만 년 전)과 마고성을 청소하여 백소와 청궁족이 큰 희생을 치룬 대 홍수가 일어난 시기인 1만 년 전까지, 전체적으로 2만 년의 빙하기 기간을 압축된 설화로 표현한 시기를 말하는 듯하다.
그림 5-10. 2만 년 전의 대빙하기 (출처: 내셔날 지노그래픽)
따라서 이들 인류의 분기시점은 대빙하기 전의 서서히 추워지기 시작하는 즉, 마고의 젖이 마르는 약 3만 년 전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실제로 이들 인류의 유전자변이가 모두 이 시점에 일어나는 것으로 보아 그러한 추측이 맞을 것이다. LL2YYG의 연도 추정이 아직 미정이지만 M9에서 바로 분기되는 것으로 미루어 대략 3만 년 전이 될 것이다.
M242(M3) 및 LL2YYG를 표현하는 이들 수렵인류(황궁)는 3만 년 전에서 1만 년 전에 이르는 대빙하기를 포함하는 긴 시간을 시베리아를 좌우로 횡단하고, 남북 아메리카를 상하로 휘저으면서 매머드를 포함한 거대 포유동물을 멸종시킨 사냥의 귀재들로 살았을 것이다. 시베리아를 횡단하며 발견되는 구석기시대의 비너스 탄소연대측정 기록이 3만~2만 년 전이라는 것도 필자의 연도 추정을 반증한다.
이들 수렵인 들은 몹시 추워진 빙하기에 어떻게 이렇게 대륙을 종횡으로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을까? 최고의 빙하가 덮친 2만 년 전에는 북유럽 구석기시대 유적에서 썰매가 발견되었다고 하며, 필자가 읽은 한국일보기사에 의하면, 개의 기원이 1만5천 년 전 시베리아산 늑대라고 하는데, 적어도 극도로 추웠던 2만 년 전 최초의 수렵용 사육의 시작으로 시베리아에서부터 처음으로 개를 길들인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니 개썰매는 구석기시대에도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빙하가 후퇴한 1만 년 전에서 정착농경이 시작되는 6-5천 년 전까지, 그리고 그 후에도 일정 시기까지 이들을 대표하는 용어가 있었다. 그것은 스텝지역을 내달리던 ‘기마 민족’이라는 말이었다. 이후 역사시대에도 끊임없이 ‘농경민족’의 터전을 괴롭히던 유목민 문화의 뿌리는 여기서 시작되는 것이다.
수메르인들이 처음 나타날 당시로서는 너무나 높은 ‘문명’수준에 주변 민족이 모두 야만족이 되어버렸다. 이것을 심지어 우주인이 만든 문명이라는 말도 하는 책이 나왔다. 수메르인이 우리와 같은 교착어(단어의 뒤에 조사나 접사를 사용하는 언어이며 실제로 수메르어는 교착어임)를 사용하는 우랄-알타이어족이라면, 이러한 문화격차는 어렵지 않게 추정이 가능하다.
적어도 문명이 발전하려면 ‘고생’이라는 요소가 필수적이다. 처음 5~6만 년 전 대책 없이 바다로 떠밀린 이들이 ‘배’를 발명하고, ‘거석문명’을 창조하였지만, 빙하기를 이길 수 있는 풍부한 해산물의 안락함에 빠져 발전을 하지 못하고 결국 주변 육지의 민족에게 피정복화, 동화의 길을 가게 되었다.
남들은 비교적 따뜻하고 안락한 곳에서 채집-농경을 할 때, 북풍이 몰아치는 매서운 눈보라를 이기고 생존해야할 ‘필요’가 차원이 다른 ‘기술발전’을 낳게 된 셈이다. 어떻게 보면 가장 원시적 생활을 하고 뒤늦게 문명이 싹튼 유럽이 오늘날 세계를 주름잡지 않는가? 그러나 수메르인들은 결국 주변인과 구분되는 높은 담과 성을 쌓은 덕분에, 주변의 소위 ‘야만족’에게 후손도 못 남기고 멸망당하고 말았다. 주변인과 몸소 결혼정책을 실시하여 덕(德)으로 감화시키고 만주와 한반도에 대통일 문명을 창조한 고조선문명과 여러모로 비교된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유목생활의 인도-유러피안어족인 스키타이족(유럽동부 서시베리아평원지역의 러시아, 또는 카자흐스탄지방에 거주), 말이 끄는 전차를 사용한 앗시리아인(셈어족)인데, 이들과 수렵생활의 우랄-알타이어족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원시 한반도의 밀, 보리농사로 미루어 분명 스텝을 가로지르는 문명 간의 교류가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즉 한반도의 신석기인 주거지에서 오곡이 발견된 것을 상기해보자. 소로리 볍씨를 제외하고 최고 탄화미로도 알려진 BC 2,300년 유적지라면 오곡이 발견된 주거지가 사실은 고조선 초기의 청동기 시대 주거지로 생각된다. 보리는 동시기 중국 황하유적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내륙의 서북쪽 지역에서만 발견되며 페르시아가 기원인 겨울 작물이기 때문에, 북방전래루트를 확인시켜 관계자를 경악시켰다고 필자가 읽은 한 신문기사는 전한다.
그러나 솔직히 의문스럽다. 신라와도 관련된 황금문명의 스키타이인들이 문자를 남기지 않았는데 백과사전은 어떻게 이들을 인도-유러피안이라고 분류하였을까? 스키타이인의 그림, 조각, 풍속 등 백인의 외모로 미루어 ‘이란계’라 본 듯하다. 그런데 이해하기가 힘들다. 이들은 알타이산에서 금을 채취한 기마민족이다. 우랄어를 사용하는 백인계통의 핀, 사미족과 관련성이 없을까?
또한 이란어는 인도-유러피안어지만 주어-목적어-동사의 어순을 취하고 인도의 힌디어도 마찬가지다. 북유럽-흑해-이란-인도의 대각선으로 이어지는 문화 교류의 접선이 존재한다. 최근 스키타이와 흉노(훈족)의 연관성, 그리고 흉노와 신라왕통인 김알지계의 연관성을 주장하는 글 들이 있다.
하지만 말을 타지는 않았지만 전차를 끄는 용도로 사용한, 확실한 셈족 백인계의 앗시리아로 볼 때는 그 대각선을 넘는 고대의 문명의 교류가 있던 것은 사실이다. 이들은 전차를 사용하여 한 때 중동지역의 패자가 되었다. 개의 기원이 시베리아산 늑대라고 하지만 모든 문명권에서 개를 사육하였음이 각종 고대 유적에서도 발견되는 것도 고대 세계의 문명 교류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추정이다.
이 고대의 문명교류의 접선은 역사시대 이후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 그리고 당나라 이후 현재의 비단길을 횡단한 돌궐(투르크)루트하고는 또 다르다. 문화인류사학자들은 알렉산더의 헬레니즘 문명의 영향을 신라의 석굴암 불상까지 관련시킨다. 또한 투르크인의 기나긴 서방원정은 한때 몽고의 지배도 받았지만, 현재의 ‘~스탄’이라는 국가들을 경유하여, 북아프리카를 지나 이베리아 반도(스페인)까지 그 영향력을 확대시켰다. 투르크메니스탄과 터키의 언어는 알타이어이나 함셈어족과의 혼혈로 서쪽으로 갈수록 백인화 되었다. (손님의 거처에 부인을 묵게 하는 투르크 유목민의 혼혈지향풍속은 마르크폴로의 동방견문록에도 소개되어 있는데, 드넓은 지역 환경에 드문 인구밀도에서 근친교배의 위험성을 막고 잡종강세를 유지하기위한 생물학적 해석도 가능하다.)
그러나 스키타이로 볼 때는 문명의 교류가 아닐 수도 있다. 스키타이인이 현재의 핀란드 거주 우랄어족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또 다른 증거가 있다. 그것은 핀란드에서 유래된 것으로 유명한 ‘사우나’가 스키타이인의 유적지에서 발굴된 일이다. 핀란드의 역사에서 핀족은 기원을 전후하여 이 지역에 이주한 것으로만 나와 있을 뿐이다. 그 이전의 핀족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며 스키타이는 BC 8-7세기에서 BC 4-2세기 사이에 존재하였으며, 그 이후는 역시 이란계통으로 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유목민인 사르마티아인에 흡수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르마티아인 역시 기원 후 4세기 이후 훈족의 침입으로 게르만-슬라브족에 흡수되어 사라진 민족으로, 이들이 정말 ‘이란 계통’인지 의문이다. 기록상으로는 그리스의 헤르도투스가 처음 ‘사우나’를 언급하였으며 그는 중앙유라시아의 시티아 주민이 그러한 풍속을 가졌다는데, 그 곳이 바로 스키타이인이나 사르마티아인이 살던 곳과 동일 지역이다.
한편 북미에 야생마가 존재하지만, 중남미 인디오(M242의 아류인 M3) 들은 고산지방에서 화전 농사를 지었을망정, 말을 이용하지 않았다. 또한 이들이 사용하는 아메린드어가 우랄-알타이어계라는 증거도 없다. 그것은 베링해로 구분된 문화단절에 따라 상호간의 언어와 역사가 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잉카, 마야, 아즈텍 문명을 창조한 인류들은 그들의 이동 경로(시베리아와 캐나다 북부의 빙하를 뚫고 이동)를 볼 때는 수렵을 주생활로 하였다고 볼 수밖에 없겠지만, 그들의 출발지였던 티벳 고원의 전통을 따라 멀리 떨어진 안데스의 고산지방에서 타민족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농경문화를 이룩했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황궁으로 볼 수밖에 없는 유전자 이동 지도 상, 이들이 생활상으로나마 마고복본을 정말로 구현하였던 것일까?)
그런데……, 높은 수준의 고산문명과 다른 아마존 강의 원시적인 인디오는? 그것은 잘 모르겠다. 유전자 지도 상으로는 고산문명의 인디오와 아마존의 인디오가 구분이 되지 않는다. (문명이란 무엇인가? 멸망한 고도 문명의 계급사회와 현대 문명사회에서도 여전히 전통적 삶을 유지하고 있는 원시적 공산사회……. 그들은 각자 최선의 삶을 선택했을 뿐일 것이다.)
최근 브라질 상파울로 대학의 Walter Neves교수는 아마존에 사는 인디오들이 베링해를 건넌 아시아인(M242)보다는 유전적으로 오스트레일리아나 심지어 아프리카의 인종과 가깝다는 설을 제시하였는데, 필자도 그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남미 아마존 강의 원주민이 어로를 주생활로 하고 있다면, M130 유전자를 가진 인류가 호주에서부터 카누를 타고 남태평양제도를 거쳐 건너 왔을 가능성을 생각해야한다.
그림 5-11. 티벳불교도들이 수미산으로 여기는 신산(神山)인 피라미드를 닮은 카일라스산 주봉 캉린보체.
아무튼 산(山)의 한자어는 이렇게 삼신의 모습을 형상화한다. 인류의 산에 대한 기억은 신기하게도 극과 극에서 서로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마고를 의미하는 중남미와 이집트의 피라미드라는 생각이 든다. 최근 티베트에서 히말리야 산맥의 카일라스산 인근에 피라미드가 발견되었다는 러시아 발굴학자와 산을 착각한 것이라는 중국인 학자 사이의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이 산이던 피라미드이던, 매우 오래전부터 그 지방에서 출발한 고산지방출신 인류들의 산을 숭배하는 공통된 (마고)신앙이 양극단의 피라미드 문화의 원형이 아닐까한다.
또한 최근에 중국 서안 일대에서 ‘피라미드’가 발견되었다는 이야기가 네티즌사이에서 나돈다. 중국 당국은 주나라문명이라고 하지만 이 피라미드는 얼핏 보기에도 고구려의 장군총을 닮은 모습이라 네티즌은 전설적인 환국문명이라 주장한다. 사실이야 어떻든 우랄-알타이문화의 12연방의 환인제국이 동서로 2만리(시베리아), 남북으로 5만리(남북아메리카?)라는 이야기가, 시베리아 수렵민의 광범위한 이동을 고려한다면 황당한 이야기라고 필자는 보지 않으며, 중국의 내륙에 피라미드를 건설 못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역으로 중국인(청궁) 역시 고산지방출신으로 피라미드(마고대성)의 기억(서왕모?)을 공유하지 못할 이유도 없고, 대규모 인력동원이 이루어져야 건설이 가능한 피라미드가 집약적 농경사회를 전제로 한다면 중국문명일 가능성도 전혀 없지는 않다.
이 글은 자연과학분야의 전문가이면서 '샤카스바비큐'의 어드바이저인 이영득 박사의 개인블로그에서 옮겨 저장한 글입니다.
바비큐는 인류학에서 생존과 진화에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연구자료로 활용하고자 이 곳에 자료를 옮겨 놓습니다.
기존의 일반화된 견해와 다른 부분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런 면에서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느끼는 샤카의 의도와 일치하므로 연구자료로 활용 계획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