思史 (3) 관념 암살

Shaka Chaa
2021-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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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고인돌

 

 


그림 3-1 강화도 고인돌

 

  우리나라는 고인돌 천국이다. 세계에서 가장 고인돌이 많이 분포하는 곳으로 전체 고인돌의 약 60%가 우리나라 그 중에서 고창 등 전라남도 지방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고인돌이 분묘양식이라면, 우리나라는 거대한 공동묘지였던 셈이다. 이 고인돌이 청동기시대의 유물이라는데, 별다른 이의가 없었다. 왜냐하면, 고인돌 밑에서 청동제의 비파형 동검이 나오기도 하고, 적어도 초기 국가를 형성한 농경사회기반의 초기 국가형태인 고조선 정도의 계급사회가 아니면, 수많은 군중을 동원하여 이러한 거대한 돌을 운반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인돌은 우리나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칭 신비에 쌓인 ‘거석문화’의 고인돌 양식은 북유럽과 서유럽, 지중해 연안지방을 거쳐 중동지방과 북아프리카, 영국, 스위스 등에도 분포되어 있으며 아시아에는 인도 남부, 자바, 인도네시아, 필리핀, 오키나와 등지에도 분포되어 있다. 유럽지방에서 발견되는 고인돌은 그 유명한 스톤헨지를 비롯하여 투박하게 생긴 우리나라 고인돌보다도 훨씬 세련된 것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고고학자들은 석기시대의 유물이라고 비정하는데 유독 우리나라만 청동기 시대라고 고집을 하는 듯하고 국사 교과서에도 그렇게 나온다.

 

 


그림 3-2 영국의 스톤헨지

 

  좋다. 우리나라의 고인돌 양식은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다. 그런데, 인류의 고대 문화 가운데 쉽게 변하지 않는 양식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분묘양식이며, 고고학자들이 분묘양식에 집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찌하여 고인돌만은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라 단정하는가? 그 사람들이 석기시대에는 고인돌을 만들지 않았다는 보장이라도 있는가? 오히려, 석기시대부터 만들어온 고인돌의 유습이 청동기 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는가?

 

 

지금도 고인돌을 만드는 인류가 있다. 그 인류가 바로 이전 장에서 이야기한 M130 돌연변이 Y염색체 유형을 가진 인류인 오스트로네시아 어족이다. 인도의 대표적인 오스트로네시아 어족인 문다족이 고인돌을 만들고 있으며, 인도네시아 발리 동쪽의 숨바 섬 주민들이 규모는 작지만 그러한 고인돌을 만든다. 현재의 그들이 청동기시대, 석기시대인들 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림 3-3. 고인돌의 초승달 (출처: 월간조선)

 

  고인돌의 남방 유래 설을 주장한 학자가 있다. 남들은 책상머리에서 고고학을 연구할 때, 과감하게 현지답사를 하고 해류의 방향을 검증하고자 무모한 필름 통을 바다에 던지기도 했던 한국 고고학계의 거장 김병모 교수이다. 월간조선에 실린 김병모 교수의 연재물들은 무척이나 흥미진진한 읽을거리이기도 하다. 김병모 교수는 ‘고인돌의 초승달’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발표하였다. 그러나 김병모 교수의 스승은 이 개념을 발표할 당시 김병모 교수를 말리기도 하였다한다. 왜냐하면, 한국인의 정서상 야만인으로 생각되는 남방문화 전래설이 몹시 언짢은 개념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병모 교수는 이를 “관념 암살(Idea Assassination)”로 간주 꿋꿋하게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관념 암살이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대한 부정과 같은 개념이다.

 

 

필자는 김병모 교수의 용기 있는 연구와 주장에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낸다. 하오나, 외람되게도 책상머리에서 남의 글이나 인용하는 필자지만 이제 김병모 교수의 여러 주장 중 수정하고 버려야할 개념이 있음을 지적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계급사회를 이루는 농경 사회’만이 고인돌 같은 거석문화를 만들 수 있다는 또 다른 ‘관념 암살’이다. 김병모 교수의 주장을 종합하면 본인의 본관인 김해 김씨 및 김해 허씨의 조상이자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황후 일파의 후손으로 중국의 보주지방을 거쳐 기원을 전후하여, 인도의 아유타국에서 농경문화와 불교를 전파한 드라비다어족 또는 유럽인과 같은 아리안 계통인 일행이 한반도에 널리 퍼진 고인돌을 만들었다는 것을 주장하는 듯하다. 그러나 고인돌의 기록은 그 보다 훨씬 전이어야 한다.

 

 

3-2. 어로생활 인류의 이동

 

 


그림 3-4 유전자 이동지도 (출처: 한겨레)

 

  소위 ‘남방계’ 한국인의 원류에는 두 무리가 있다. 하나는 M175 유형의 쌀농사 문화의 전래자인 ‘티벳-중국어족’이요, 또 다른 하나는 지금 이 장의 주인공 M130 유형의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이다. (어느 쪽이던 남방계문화가 존재함을 부정하는 순혈주의의 북방계 단일민족주의자가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국에서 발견된 세계 최고(最古)의 소로리 볍씨(충청북도 청원군)가 무려 1만 5천 년 전이라고 하지만, 구석기시대 인이 농경사회를 시작했다는 것은 매우 무리한 주장(사실은 무리하지 않은 주장이다. 그 이유는 후술할 것이다.)이며,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벼농사의 전래는 기원전 2,300년경 한강하류(고양시, 김포 지역) 및 대동강유역에서 처음 시작되어 이후 남부지방으로 뒤늦게 전파되었다고 한다. 이 두 지역은 강화도 마니산에 무척 가까운 현재의 한강하류 고양시 지역, 고조선의 수도로 추정되는 평양이 있는 대동강 유역 등 의심할 바 없는 청동기시대 국가인 고조선 지역이다. 현재의 곡창지대인 남부지방에는 불과 ‘기원후 1세기 경’(지금으로부터 1,900년 전)에 발견된 탄화미(김해 지방)가 최고의 기록이었다. 기록상으로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에서 AD 16년(남해왕), 고구려본기에서 AD 55년(태조)의 벼멸구 피해가 보고되어 있으며, 백제본기에는 ‘다루왕 6년(AD 33) 2월 나라의 남쪽 주군(州郡)에 벼농사를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대부분의 고인돌이 주로 집중되어 발견되는 지역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전라남도 영산강 일대 지역이다. 고인돌이 농경사회의 유물이라면, 또한 드라비다인(허 황후 일행, 유전자 이동지도상 M20)이 흑조를 타고 중국의 보주지방을 거쳐 불교와 함께 남쪽에서부터 겨우 기원을 전후하여 벼농사를 전파했다(김병모 교수의 논리)면 뭔가 엇박자가 있지 않은가? 기록상의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는 아시다시피 철기문명의 국가들이다. 고인돌 건조의 청동기 문명이라 해도 한참 먼 이야기이기도 하다. 분명 철기 혹은 청동기 문명의 벼농사를 본격적으로 짓는 북방계 혹은 김병모 교수의 주장처럼 남방계 이주민세력이 남진(혹은 북진)하기 이전에, 한반도 남부지방에는 벼농사를 짓지 않고 거주하는 고인돌 축조 문화의 선사시대 주민이 있었다.

 

 

그렇다면, 남방의 거석문화의 주인공들은 다루왕 6년까지 농사도 안 짓고 뭘 먹고 살았을까?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인돌은 ‘영산강변’에 주로 분포하며 우리나라의 고인돌의 분포양상은 주로 ‘해안과 강가’에 분포한다. 당연히 그들의 주업은 ‘어로 생활’이라고 생각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어로 생활을 반증하는 또 다른 증거가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 남부 지방 및 동해안에 분포하는 암각화이다. 이 암각화는 선사시대부터 철기시대까지 덧그림이 존재하며, 이는 청동제 또는 철제의 정과 같은 도구를 사용한 패인 자국의 변화로 추정이 가능하다. 그렇게 보았을 때 그림은 구상화에서 추상화로, 면 위주에서 선 위주로, 어로에서 수렵화로 모양이 바뀌며 특히 울산 반구대 암각화는 대규모 고래잡이 그림으로 유명하다. 이 암각화와 고인돌의 연관성은 분포지역의 일치와 고인돌 표면에 새겨진 성혈과 동심원 문양이 암각화와 일치한다는 특성에서 그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암각화는 중국 및 내몽고지역에서도 발견되지만 한국의 암각화는 연해주의 것과 유사하다는 특징이 있는데, 이 분포의 특징은 바로 M130 유전자인류의 이동 경로와 일치한다.

 

그림 3-5 암각화 탁본

 

  연해주라고?…… 그렇다. M130 인류는 ‘일본’을 지나 ‘연해주’로, 그리고 ‘캄차카 반도’로 이주하여 나아가 북아메리카에 까지 널리 분포한다. 이 돌연변이형은 매우 드물게 발견된다. 그것은 이동속도가 매우 빠르다는 것을 의미하며, 배를 이용하였음을 반증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연해주와 캄차카 반도에 살았던 그리고 지금도 살고 있는 민족이 누구인가? 바로 뒷머리를 땋고 앞머리를 ‘왜인’들처럼 박박 밀어버린 변발 풍습을 가졌던 퉁그스인인 여진족 또는 말갈족을 의미한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스펜서 교수의 프로젝트가 진행 중인 내셔날 지노그래픽 사이트(https://www5.nationalgeographic.com/genographic/)에 의하면, 징기스칸으로 대표되는 몽고족에게서도 이 M130형이 주요 유형으로 발견된다고 한다. 

 

 


그림 3-6 징기스칸과 M130 유전자의 이동경로 설명문 (출처: 내셔날 지노그래픽 사이트)

 

  혹시 우리는 은연중에 몽고인을 순혈주의의 북방계 유목민족으로 여기고 있지 않은가? 몽고인은 원래 시베리아 동부지역의 산림지대에 거주하였다. 현재의 몽고지방은 사실은 흉노, 돌궐족이 거주하던 무대였으며, 돌궐족이 떠난 뒤에 이들 시베리아의 수렵민들이 그 자리를 메운 것이다. 몽고인 역시 M242 유형의 북동부로 이주한 시베리아인과 M130 유형의 오스트로네시아인의 혼혈민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퉁그스계의 말갈족의 어원은 ‘물길’, Mulke에서 유래되며 ‘물가의 사람들’ 또는 ‘숲속의 사람들’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필자의 느낌대로라면 우리말 ‘물가’와 그 어원이 같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만큼 우리 민족과 매우 가까운 역사와 혈연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김욱 교수의 DNA 조사에 의하면 일본인이나 몽고인보다도 훨씬 가깝다. 그것은 과거 고조선, 고구려, 발해를 거치면서 우리 민족의 주류와 매우 밀접한 혈연적 관계를 유지하여 왔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그들의 언어는 일본인만큼이나 우리와 차이가 있다. 언어는 혈연이 아니라 ‘문화의 차이’일 뿐이다. 퉁그스인은 지금도 우수리강가에서 어로생활을 하고 있다. 북방계라 하여 단순하게 유목민으로만 평가하지 말자. 필자의 추정으로는 단군왕검의 두 번째 부인인 하백녀, 그리고 동명성왕의 어머니이자 하백(물의 신)의 딸인 유화부인, 주몽이 부여를 탈출할 때 결정적 도움을 준 비류호의 거북이와 물고기가 바로 이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이주 역사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1만5천 년 전에 아메린드어족이, 그리고 6천 년 전(BC 4,000년)에 나-데네어족이 이주하였다고 하는데, 이 나-데네 어족에는 캐나다, 북 캘리포니아 지역에 한정되며, 그 유명한 호전적인 아파치나 나바호족이 이 그룹에 속한다. 유전자 인류이동 그림 상으로, BC 4,000 년경에는 배가 아니면 베링해협을 건너가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아 이들이 바로 M130 유전자 인류의 갈래가 아닌가 한다. 세 번째로 4천 년 전(BC 2,000년 경) 아무르강에서 이주한 또 다른 인디언은 현재의 아메리카 에스키모를 의미한다고 한다.

 

 

3-3 거석문화의 주인공

 

 

그렇다면, 이 남방계 어로 인종이 한반도에 도착한 시점은 언제로 보아야 할까? 최근에 제주 모슬포 앞바다에서 발견된 인류의 발자국화석으로 보아 대략 5만 년 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 모슬포의 인류발자국은 코끼리 등 무수한 동물 발자국과 같이 발견되었으며 인류 이동역사를 새로 쓸 만큼 세계적인 발견이기도 하였다. 현재도 발굴이 지속되고 있으며 논란의 여지는 있으나 5만 년 전으로 추정하는 근거는 주변의 지층의 연대로서 추정한 것이며 필자가 보기에 논리적으로도 매우 근접한 추정으로 생각한다.

 

 

6 ~ 5만 년 전 호주로 이동한 인류가 4만 년 전 시나이 반도를 거쳐 유럽으로 갔다면 그 보다 훨씬 가까운 한반도에 당시 이들이 오지 못하였다는 것이 오히려 더 이해하기 힘들다. 하지만 이 시기는 뷔름빙기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시기였으며 2만 년 전의 대빙하기까지 계속 추워지는 시기였으므로 북으로 이주한 (아이누족), 여진족, 몽고족, 아파치족의 형성은 상대적으로 느린 시기(1만 년 전 이후)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1만 5천 년 전에 넘어가 남미까지 진출하여, 아즈텍, 잉카, 마야문명을 이룩한 북방계 M242 인류(인류이동 지도상 아형인 M3형) 보다 매우 늦은 시기에 북아메리카의 인디언인 아파치족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반도는 이들 어로민족에게 세계적인 ‘고인돌의 숫자’만큼 매우 장기간의 훌륭한 안식처를 제공하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유명한 군장이나 족장 급의 무덤인 고인돌 숫자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긴 세월 살아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서해안의 풍요한 갯벌지대는 2만 년 전에 불어 닥친 대빙하기의 혹독한 추위와 식량자원의 감소를 이겨낼 수 있는 패류를 제공하였고, 이들 패류가 선사시대의 주식량이었음은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되는 ‘조개무지’로 입증되고 있다.

 

 

김병모 교수의 고인돌의 초승달을 보면, 일본의 규슈지역에도 동일한 거석문화의 흔적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들의 주 활동 무대는 규슈가 아니라 한반도였다고 추정되는데, 화산섬은 어로 민족에게도 그다지 좋은 거주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규슈를 제외하고 일본의 본토는 고인돌 분포의 예외지역이기도 하다. 전 세계 60%의 고인돌이 한반도에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5만 년 전에 한반도에 도착하여 이 후 ‘거석문화’를 창조하였으며 1만 년 전 아니 그 이후 역사시대의 일정 시기까지도 한반도를 기점으로 전 세계로 고인돌 문화를 전파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고인돌은 남방유래가 아니라 자생문화가 올바르며 그렇게 해석할 방법 밖에 없다.

 

 


그림 3-7 발리섬의 돌하르방 (출처: 월간조선)

 

  김병모 교수는 남방계 거석문화의 또 다른 증거로서, 제주도의 돌하르방과 너무나 닮은 발리섬의 돌하르방, 이스터섬의 거대한 석상을 예로 들고 있다. 그렇다면 청동기 이전에 이렇듯 정교한 석상을 제조하거나 고인돌을 다듬거나, 암각화를 조각하기위한 날카로운 석기시대의 유물이 존재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태평양의 여러 섬처럼 화산 지형에서만 발견되는 흑요석이다. 흑요석은 강도가 매우 단단하며 또한 깨진 결에 따라 바로 날카로운 면이 들어나 별다른 가공이 필요가 없다.

 


비화산지대의 한반도에서는 ‘백두산’출토의 흑요석과 ‘규슈’출토의 흑요석 유물이 도처에서 발굴된다. 이를 보고 모 방송국 다큐멘터리에서는 한반도의 후기 구석기인들이 규슈지역의 조몬시대인들과 무역(?)을 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들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아니었으며, 삶 자체가 어로생활이었다면 재료의 채취와 생활거주지의 차이가 쉽게 설명이 될 것이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래잡이 그림으로 유명한 암각화처럼 얼마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배’의 유적이 경남지방(경남 창녕군 부곡면 비봉리 신석기 유적지)에서 발견되었다. 이 선박은 지금으로부터 약 8,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오래된 것이다.

 

 


그림 3-8 한반도에서 발견된 흑요석기 유물

 

  충격적인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한반도의 선주민을 역사 속에서 ‘왜인’이라고 불렀다. 왜인이 한반도에 살았다는 이야기다. 왜인의 한반도 유래설은 필자 이외에도, 프레시안에 연재된 바 있는 김운회 교수가 여러 고대 기록 문서를 분석한 ‘대쥬신을 찾아서’라는 칼럼에도 제시한 바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 북방계 이주민 세력에 흡수되지 않고, 일본지역으로 그 주력이 퇴출된 결정적 사건은 신라의 요청에 따른 광개토대왕의 정벌과 연이은 백제의 남진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 것으로 추정한다. 고인돌 분포지와 동일한, 미스터리한 영산강 유역의, 일본식과 똑 같은 ‘나주 고분군’과 한반도, 연해주, 일본 남서부 해안에 분포하는, 살상력이 비파형 보다 강한 ‘세형동검’은 북방계 이주민(역사시대 건국의 주역들)이 들고 온 철기문명의 유입에 저항한 이들의 정치세력화를 엿보게 한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식민시대 대표적으로 왜곡된 역사의 일부로 평가받던 ‘임나일본부설’은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라 사실은 일본인들의 본거지였을 가능성이 있다. 우리가 그것을 감정적으로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림 3-9 일본식과 똑같은 나주 반남 고분군, 옹묘, 금관 등의 유물

 

  그러나 영산강 유역의 저항세력이 우리 역사 속에 실재한 ‘마한’의 잔존세력이었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재야 사학자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역사서 한단고기에 의하면, 마한은 고조선의 삼한관경의 한 지역으로 원래는 한반도 일대를 통칭하는 지명이었다. 고대 청동기시대의 부족 간 통합은 수직적인 정벌이 아니라, 수평적인 통합을 매개로 하였고 그 주요한 통합의 매개 고리는 ‘통혼’이었다. 이것은 끊임없는 정복전쟁을 기록하며 승리자의 기록만을 전하는 역사서의 편년체식 서술보다 그것(삼국유사)에 ‘기이편’으로 기록된 숱한 설화와 건국신화를 볼 때도 그러하다.

 

 

한단고기는 근세의 누군가에 의한 위조의 흔적이 역력하다하여 정사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서적이다. 필자는 그 서적의 진위에는 큰 관심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의 방주 같은 구약성서의 이야기, 세계 도처에 내려오는 구전 설화도 아무런 근거가 없는 상태라 하더라도 ‘과학적 탐구자’에게는 소중한 실마리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외국의 신화는 역사의 실마리가 되며 한국의 신화나 서적은 쓸데없는 이야기가 되는지 그것이 궁금할 뿐이다. 한단고기를 적극 옹호하지는 않겠지만 그것을 부정하는 역사학자들이 스스로 정사로 인정하는 삼국유사의 ‘기이편의 서문’을 반드시 다시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삼국유사의 주장은 지금 서술하는, 필자와 똑같은 문제인식을 공유한다. 더욱이 한단고기의 일식 등의 천문현상은 현대 컴퓨터 계산의 결과 사실임이 밝혀졌다. 근세의 누군가의 위작이라고 하더라도 이처럼 방대한 자료를 소설처럼 쓰기는 어렵다.

 

 

아무튼 김병모 교수가 지적했듯이 알에서 태어났다는 한국의 ‘난생설화’는 남방계 오스트로네시아 어족의 고유한 설화이다. 하늘에서도 내려온 ‘천강신화’를 간직한 다른 건국신화와 달리, 제주도 탐라국은 고, 양, 부 삼성이 땅 속의 구멍 속에서 나오는데, 이 ‘구멍설화’ 역시 남태평양 폴리네시아 지역에서 흔히 발견되는 시조설화라고 한다. 고, 양, 부 삼성은 ‘망아지, 송아지’(유목) 및 ‘오곡’(논, 밭농사)의 씨앗과 함께 온 벽랑국의 세 공주(북방계 대륙의 이주민이었던 ‘동이족’으로 생각됨)와 결혼하며, 한단고기에 의하면 단군왕검의 덕이 저 멀리 ‘탐랑국’에까지 미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부족 간 통합체의 고대국가의 임금을 뽑는 방식도 수평적인 화백회의나 심지어 부족장간의 힘겨루기 방식의 평화적 방식을 수행했음이 ‘해모수와 하백의 변신술 경합’, ‘김수로왕과 석탈해의 경합’으로 나타나며 이는 북방계 동이족과 남방계 어로 민족 간의 수평적 결합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김수로왕과 결혼한 허황후가 인도의 아유타국(김병모 교수의 주장)이 아니라, 한반도의 왜인세력이라는 이희근 씨의 주장(월간중앙)에 동의한다. 한반도에 형성된 문화와 역사 공동체에 편입된 그들 역시 현재의 우리 몸속에 피를 남긴 ‘조상’인 것이다.

 

 

옥저의 민며느리제, 고구려의 데릴사위제는 풍습이라기보다 의도적인 부족 간 통혼의 과정으로 생각하며, 신라까지 쳐들어온 말갈족(고구려의 이용으로 보임)의 의미는 생활 문화마저 완전 통합되지 못한 말갈풍의 고대의 옥저나 동예세력으로 간주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한반도 남부의 왜인 역시 어로 생활을 하며, 고조선 및 마한의 일부 세력으로서 통혼화 과정에 있었고, 심지어 고조선의 중심지였던, 중국의 동부해안 및 발해만에 분포하는 북방식 고인돌에 그 유습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3-4. 크로마뇽인과 한국사 미스터리

 

 

반면 4만 년 전 유럽으로 이주하여 화려한 문화유적을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크로마뇽인은 유물과 화석이외는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혹자는 갈색피부에 파란 눈을 가진 카나리아제도의 관체인이라고도 하며, 오글프로젝트에 의하면, 3만 5천 년 전 M45형에서 분기한 M173형이라고 하지만, 그 유전자형을 표현하는 게르만족은 훈족의 침입이 시작된 기원후 4세기 말경이 아니면 유럽지방으로 이주하지도 않았다. 

 

M89형에서 분기한 M172형은 켈트어족과 관련이 있는데, 이들 역시 소위 비커형의 분묘양식을 가진 이들로 BC 8 ~ 6 세기경의 청동기시대 이주민이다. 선주민으로서, 스페인 북부지역의 고립어를 사용한 바스크어족이 있지만, 이들의 언어는 우랄어처럼 동사가 문장 뒤에 오는 형식을 취하며(요코하마 유지, 선사예술기행) 필자생각으로는 핀족과 계통이 같은 북방 수렵민의 후예로 보인다. 그렇다면 남은 민족으로서 지금은 사라져버리고 없으며 페니키아 문자를 도용해 도무지 해석 불가능한 언어비문을 남긴 ‘이베리아인’이 가장 가까울 것으로 생각했다.

 

 

최근 서구의 과학자들은 크로마뇽인이 유럽의 주류인 게르만족 인류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영국의 생물학자가 게르만족인 M173형을 크로마뇽인과 연계함은 또 다른 ‘관념 암살’이다. 키가 180 cm 이며 유럽인과 비슷한 얼굴이라는 착각을 준 크로마뇽인은 한반도의 고인돌아래서 발견된 황석리인의 복원된 얼굴에도 남아있다. 심지어 충무앞바다의 연대도에서 발견된 유골은 흑인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고인돌 밑에서 발견된 유골의 복원 결과는 여전히 풀지 못한 한국사의 미스터리라고 모 언론에 소개된 바도 있다. 최근에는 강원도 정선의 아우라지 유적의 고인돌 묘에서 출토된 인골의 DNA분석 결과는 서양인 특히 영국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해하지 못할 결과가 나왔다. 필자의 의견은 아마도 스톤헨지의 주인공과 같을 것이다. 명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조상이 백인 또는 흑인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미스터리로 남기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필자의 추정대로라면 그들은 현재의 코카서스인종이나 니그로인종과는 전혀 다르지만, 적어도 코가 높은 아메리카 인디언 즉 홍인종으로 분류된 인류의 모습과 가까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몽고반점 등 형질유전에 집착하는 강고한 착각은 이미 과학적으로 부정된 지가 오래이다. 우리는 껍데기에 불과한 모습을 규정하는 단백질이 아니라 그 설계도인 유전정보를 직접 눈으로 보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그림 3-10 황석리인의 두상

 

현대 생물학의 방향성에서 볼 때, 형태학보다 유전학적 증거가 더욱 강할 수밖에 없다. 필자가 보기에는 이 크로마뇽인 또는 어로민족은 소위 현대의 주요 문명인들의 조상이 이란의 고원지대에서 풀 뜯어먹고 있을 때, 해양과 지구 곳곳을 정복했던 ‘문명인’으로서의 M130 오스트로네시아인일 수밖에 없다고 본다.

 

M130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은 세계 곳곳에 ‘미스터리’한 유적을 남겼다. 영국의 그 유명한 스톤헨지, 이스터섬의 모아이, 모헨조다로에서 발견되는 상형문자와 매우 흡사한 이스터섬의 롱고롱고 문자……. 이들은 바다를 통하여 건너 왔으며, 뛰어난 어로기술과 거석 문명을 창조하였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고대 그리스인의 눈에 비친 아틀란티스 문명, 마야 및 인도의 고대석판에서 발견되는 무우 문명에 대한 이야기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즉 이들이 선보인 해양문화의 선진기술은 육지에 살던 이들의 머릿속에 지질학적으로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는 ‘환상’의 대륙(고인돌 분포를 보면 이 대륙이 한반도일 가능성이 높다.)을 창조한 것이 아닐까 한다.

 

 

조금은 끔직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이들과 일부 도서지역의 식인문화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크로마뇽인이 유골을 전시했음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물론 대개 동일한 어족이었겠지만 고립된 섬 지역에서의 계속되는 침략자들과의 전투, 그리고 극심한 해양의 기후변동 및 식량부족에 따른 단백질 공급이라는 측면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 한편으로 조상의 시신을 독수리 먹이로 풍장하는 티벳인이나 북극곰 먹이로 부모의 시체를 버리는 에스키모인들이 그 포식자를 다시 잡아먹어 자신의 신체 속에 영원히 조상의 흔적을 잊지 않으려는 풍속- 결국은 농경민의 매장문화와 제사음식의 음복행위도 크게 다르지 않다-과도 같이 변질된 조상 숭배의 전통이라는 측면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설마, 자바원인이나 네안데르탈인을 잡아먹지는 않았겠지. --;)

 

 

아무튼 이베리아인은 고대 그리스시대의 노예로서 소멸되어 버렸으며, 인더스문명에서는 선거주민이었던 문다족이 드라비다족의 노예 또는 피지배 인으로서 어느 순간 문명 역전에 따른 피지배를 당하기도 하였지만, 마다가스카르에서는 니그로 종족의 지배자로서 군림하기도 한다. 이러한 신분사회는 민족 간 ‘전쟁’의 결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보노보 사회와 같은 자연계의 단면처럼 역사는 이러한 정복전쟁만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바로 우리 자신들처럼 ‘혼혈’의 결과로 남기도 하며, 그러한 혼혈과 ‘잡종강세’의 전략을 유지했던 잃어버린 우리의 민족문화가 ‘태극’ 사상의 기원이 아니었을까한다.

 

 


그림 3-11 삼태극



  • #교육·학문



이 글은 자연과학분야의 전문가이면서 '샤카스바비큐'의 어드바이저인 이영득 박사의 개인블로그에서 옮겨 저장한 글입니다.

바비큐는 인류학에서 생존과 진화에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연구자료로 활용하고자 이 곳에 자료를 옮겨 놓습니다.

기존의 일반화된 견해와 다른 부분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런 면에서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느끼는 샤카의 의도와 일치하므로 연구자료로 활용 계획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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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Shaka'

Professional Barbecuer "Shaka"

Barbecue  Commentator


Barbecue Promoter & Performer / 바비큐 프로모터 & 퍼포머

Korea Barbecue University / 한국바비큐대학

Korea Barbecue Research & Institute / 대한바비큐연구소

Shaka's Outdoor & Barbecue Studio / 샤카스 아웃도어 바비큐 스튜디오

Channel Outdoor / 채널 아웃도어

Outdoor Entertainment / 아웃도어 엔터테인먼트

Production Outdoor / 프로덕션 아웃도어

Spirit Korea Magazine / 스피릿 코리아 매거진

World Barbecue Forum / 월드 바비큐 포럼

Korea Barbecue Society / 코리아 바비큐 소사이어티

Barbecue Commentator / 바비큐 해설가

Koea Outdoor & Barbecue Association / 사단법인 대한아웃도어바비큐협회 회장


"Shaka"는

국내 최초의

Real Barbecue 커뮤니티를 개설하고

바비큐 문화와 아웃도어 문화의 새로운 장을 열어왔다.


현재는 BArbecue Promoter 겸 Performer로 활동하고 있으며,


2013년 tvN에서 방송된

창직서바이벌 프로그램인

『크리에이티브 코라아』에 출연해


『프로바비큐어』라는 창직명으로

최종 Top5까지 진출하면서

세계 최초로

『프로바비큐어』라는 직업을 창직하고

바비큐의 스포츠화를 통해

새로운 문화와 산업을 만들어 가고 있다.


또한,

Y대학교에서

국내 최초로

Real Barbecue를 강의를 하는

교수를 역임했으며, 


미국에서 1959년부터 이미 자리 잡은

Barbecue Competition 문화를

세계 최초로

대한민국에서

Sports Barbecue로 재탄생 시키면서

국내

수 많은

경기대회를 주최, 주관하고 있다.


Sports Barbecue 문화의 중심에 설 

Professional Barbecuer 양성을 위해 

『Korea Barbecue University』를 설립하였으며

선수 양성 과정과

다양한 Barbecue Class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성으로

아직도 호모에렉투스를 기다리고 있는

원시주의자이며,

스포츠 바비큐 문화를 통해 

잃어버린 인간성과

무너지는 공동운명체 복원을 꿈 꾸는 

놀이주의자

『호모날리리언스(Homo-Nallarians)』다. 


 현재는

『사단법인 대한아웃도어바비큐협회』 회장을 맡고 있고,


2018년

서울에서 창립총회를 마친

『국제아웃도어바비큐스포츠연맹(IOBSF)』 사무총장으로

스포츠 바비큐의 세계화에도 단단한 밑거름을 놓고 있다. 


아울러

스포츠 바비큐 문화를 통해

4차산업 혁명 이후 도래 할  놀이혁명인

5차 산업혁명을 꿈꾸는 사회혁명가이기도 하다. 


작가로서도 활동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리얼바비큐 교과서인 『Shaka's Barbecue Primary』 (2015년, 교문사)와 

국내 식육게릴라 4인이 공동으로 참여한

『고기실무전』(2019년, 팜커뮤니케이션)이 있다.

Planning & Business Director Shaka Cha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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